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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Dec 28. 2021

Via Negroli 2, Milano

드디어 꽉 찬 아파트, 지린내의 출처

개강 일주일 전, 드디어 플랫 메이트들이 모두 입실했다. 초반에 만났던 토마스, 낯 가림이 심한 소년 시모네, 그리고 의문의 독일인 마커스. 먼지 냄새와 바람소리만 가득하던 집에 음식 냄새와 세제 냄새, 사람 소리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커스가 온날, 집안이 가득 찬 날이었다. 마커스의 캐리어는 파리에서 다녀온 후부터 놓여있었지만 짐만 놓고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토마스도 시모네도 나도 사용하지 않는 거실과 소파에 마커스가 처음으로 누웠다. 정말 본인 집 거실 마냥 누워 음악을 켜고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마커스를 마주했을 때의 첫 모습이었다.


190의 큰 키에 매우 마른 체형, 하얗고 선홍빛 도는 피부에 금발, 그리고 주황빛과 짙은 녹색이 섞인 오묘한 눈동자. 딸기우유색 후드를 입고 조금 타이트한 바지를 입어 패션 센스가 좋지는 않아 보였지만 체형과 비율이 좋아 모델 같은 인상이었고 영어가 유창한 외향적인 아이였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Hi를 외치고 kisses and hug를 나누며 이태리식 인사를 했다.

마커스의 존재로 인해 집의 분위기가 한층 더 밝아졌다. 플랫 메이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잡담도 하며 거실다운 거실이 되었고, 모두가 입주하고 나서야 마침내 온수가 제공되었다.

마커스는 독일에 있는 여자 친구와 한 주간 이태리 여행을 다녀와 개강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 또한 나와 같은 학교의 교환학생으로 온 법대생이었다.

때마침 교환학생 채팅방에 피자 파티 모임이 올라왔다. 개강을 앞두고 이벤트들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식당의 한 부분을 빌려 파티를 하고 나와 유명 클럽에 가는 일정이었다. 뒤늦게 시간 맞춰 클럽에 들어가도 된다고 했지만 이태리인 만큼 피자를 먹어봐야겠다는 마음에 마커스와 함께 가기로 했다.


밀라노의 우리 집은 두오모로부터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모임이 있던 피자집은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음날 오후, 두오모까지 트램을 탄 후, 대화를 나누며 약 40분가량을 걷고 걸어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먼 길이었지만 마커스와 가까워지고 또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에게는 독일의 여자 친구가 있었고 음악에 관심이 많아 음악을 독학해 제작하는 것이 취미하고 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왔는데, 이태리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며 고등학생 때 브라질에서 교환학생 여름캠프를 보내며 그곳에서 홈스테이 한 가족들과 아직도 연락 중이라고 했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스스로를 소개하다 보니 멀어 보였던 길을 금방 지나왔다.

피자집은 정통 이태리풍의 인테리어나 형태는 아니었다. 길고 긴 탁자에 나란히 앉아 떠들다 보니 와인과 각종 피자를 들고 있는 웨이터들이 지나다니며 조각을 제공해주었다. 메뉴판에 있는 온갖 종류의 피자를 먹을 수 있었는데, 디저트까지도 피자였다. 이날이 생애에 피자를 가장 많이 먹은 날일 것이다. 한 탁상에 여섯 명이 앉을 수 있었고 그러한 탁자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마커스와 나는 나란히 옆에 앉았고 그 앞에 독일 여자 세명이 앉아있었고 내 옆에도 독일인 친구가 앉았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날 모임에는 독일인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뒤늦게 마커스가 얘기해줬는데, 그 또한 독일인이지만 독일인들끼리 모여 독일어만 사용하며 다른 학생들과 소통하지 않는 게 보기 싫고 그들과 있을 때 이태리어도 영어도 아닌 모국어를 사용하게 되는 게 본인이 생각하는 교환학생의 취지와 어긋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친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마커스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나 또한 트레블링 바 이후로 한국인 친구들을 피했기 때문에 (사실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 같다. 성향이 달라 더 그랬다.) 그와 잘 통한다고 느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마냥 위를 늘려놓은 상태로 Alcatraz라는 밀라노의 ‘핫’하고 유명 클럽으로 향했다. 오십 명 정도의 인원이 무리 지어 거리를 지나다 중간에 대형 마트에 들어가 보드카, 위스키, 와인 등 온 갖 종류의 술을 매대에 올려놓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각자 각양각색의 병을 들고 껄렁거리고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는데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명장면 속 깡패들이 된 기분이었다. 타지에 온 피부색이 다른 타인이지만 무서울게 하나 없이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가량을 걸으며 마커스와 나는 스웨덴의 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바로 루이자 /Lovisa/와 캐스퍼 /Kasper/이었다. 둘은 커플이었는데 함께 밀라노로 교환학생을 온 친구들이었다. 캐스퍼는 정말 독특한 (비속어로는 돌아이 같은) 친구였고 루이자는 그에 반에 굉장히 차분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배려심 많은 친구였다. 마커스가 그 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플로라 /Flora/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이 친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동갑내기 영국인으로 영국 억양과 말의 속도가 어마 무시하게 빠른 친구였다. 매우 하얗고 스타일리시한 편에 왜소하지만 모델처럼 비율이 좋아 눈길이 가는 친구였다.




플로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지만, 아니 그녀가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편에 가까웠지만, 빠른 속도와 특유의 발음 탓에 30퍼센트 혹은 그 이하 정도만 알아들었다. 대강 그녀의 이야기들을 통해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 남자 친구와 나이 차이가 나며 독일인이라는 사실, 또 그녀가 독일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라는 정도만 알아들었다.



여차저차 클럽 앞에 도착했다. 바로 입장하지 않고 입구 건너편에서 트레블링 바 때와 같은 거리 친목 도모 시간이 시작되었다. 피자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뒤늦게 하나둘 나타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애완견 마냥 마커스 옆에 꼭 붙어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어갔다. 마커스는 매력적으로 생겼을 뿐 아니라 그 성격도 매력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금세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며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는 친구였다.

그렇게 서서 떠든 지 한 시간 가량 지나 다리가 아파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미 무리는 10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원으로 불어나 입구를 찾지 못해 벌집 앞을 윙윙거리며 떠도는 벌들이 된 꼴이었다. 제각기 그룹 지어 서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털이 복슬복슬한 친구가 보였다. 저절로 씩 웃음이 났고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가 툭 하고 어깨를 쳤다. 폰시가 환한 웃음과 볼 키스, 친근하지만 예의를 갖춘 포옹으로 맞이해 주었다. 트레블링 바 이후로 처음 보았고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지만 왠지 마음이 가고 다가가고 싶은 친구였다. 그 옆에는 트레블링 바에서 잠시 마주쳤던 기욤과 알렉스 (둘 다 바르셀로나 출신이다) 그리고 블라드가 있었다. 짧게 인사하고 폰시를 끌고 와 마커스에게 소개해주었다.

“내 룸메이트 마커스, 이 친구도 교환학생이야.

그리고 여긴, 저번 모임에서 만났던 친구, 폰시야.”

짧은 인사 후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쉴 새 없이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그룹이 불어나 있었지만 플로라는 나의 옆에 있었고 나는 마커스와 폰시의 곁에 있었다. 어느덧 도착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갔고 클럽 앞도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학생 하나둘 언제 들어가냐는 원성이 들려왔다.

흥이 오를 대로 올라와 더 이상 불태울 거리가 없어 꺼지기 직전일 때, 클럽에 입장했다.

한국 클럽에 가본 경험이 두 번밖에 없었지만, 이 클럽은 한국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1000명은 족히 들어갈 것 같은 매우 매우 넓은 공간이 지상에 있다는 점과 계단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흰색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왁스를 가득 바른 남자들이 많다는 점과 무엇보다 메인 스테이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달랐다.

2018년 당시에 라틴삼바 풍의 음악들이 흘러나왔는데 마냥 뛰어노는 음악들이라기보단 그루브를 타고 몸을 흔들기에 적합한 음악들이었다.

술은 두 잔까지 무료로 마실 수 있었는데, 폰시를 따라 테킬라를 주문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를 마실 때 두 손으로 받아 몸을 돌려 잔을 가리고 원샷을 하듯, 테킬라도 정석적인 방식이 있다.

바텐더가 샷 한잔, 소금, 라임 조각을 건네주었다.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혀로 핥아 적시고, 이 부분에 소금을 살짝 얹혔다.

“하나 둘 셋 하면 가는 거야!” 폰시가 소리 질렀다.

소금을 핥고 오른손에 들려있던 샷을 한 번에 들이켠 후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재빠르게 라임 조각을 입에 물어 테킬라의 뜨겁고 쌉싸름함을 진정시켰다.

테킬라는 섹시한 라틴 술이었다.

다들 점점 정신을 놓기 시작했고 초반부터 미친 듯이 춤을 추던 블라드는 사라져 있었다.

주변에는 마커스와 플로라 폰시가 있었다. 소리 지르고 웃고 몸을 흔들다 지쳐 잠시 나왔다.

클럽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폴라로이드와 장미를 든 아랍계 상인들이 돌아다녔다.

“한 장 찍어줄게요!”

마커스와 폰시가 처음 만난 날, 폰시와 친해진 날, 플로라와 처음 만난 날, 밀라노의 밤 문화를 처음 즐긴 날. 테킬라를 처음 배운 날.

이 하루가 1.50유로짜리 폴라로이드 한 장에 담겼고 이 사진은 가장 공평한 국제적 게임, 가위바위보를 통해 플로라에게 갔다.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채 마커스를 따라 트램에 탑승해 무사히 귀가했다.



다음 날, 피곤과 숙취로 늦게까지 뒹굴거리다 해가 저물었다. 마커스도 비슷한 시간에 기상했다. 왓츠앱을 통해 폰시에게 연락해 해장 만남을 하기로 했다.

밀라노의 유명 버거집이 폰시네 근처에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Porta Venezia 근방이었다.

여덟 시가 넘어 느지막하게 걸어 도착했고 폰시는 우리보다 조금 늦게 등장했다.

각자 메뉴를 시키는데,

“폰시는?”

“나는 괜찮아, 조금 먹고 나왔거든. 나는 돈이 없어서. 하하”

폰시는 외식을 하지 않는 친구였다.

느끼한 버거와 감자튀김으로 서양식 해장을 하고 나와 소화시킬 겸 근처 공원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 마트에 들러 하이네켄 몇 병을 들고 갔다.

청춘이었다.

셋은 공원 벤치에 널브러져 마커스가 좋아하는 힙합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마커스와 폰시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였고 둘이 친해지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 토픽은 약이었다. 어떤 약을 해보았는지, 각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등등.

“오, 나는 재미없어, 아무것도 몰라. 담배도 안 피우는걸.”

그저 신기해하며 질문하고 듣고 웃을 뿐이었다.

마커스에게 병따개 없이 캡 따는 법을 배웠는데 결국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열심히 끙차끙차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둘의 웃음거리가 되기는 했다.


밀라노의 낮은 태양이 뜨겁고 더웠지만 밤은 선선했다.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폰시는 현재 이모네 집에서 거주 중이었다. 이모님은 스페인인이셨고 밀라노에서 교환학생을 하다 현 남편을 만나 결혼하시고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했다.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동시에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가까워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웃고 떠들다 보니 두 시간이 지나갔다. 맥주도 떨어졌고 슬슬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마커스는 아쉬웠는지 폰시에게 함께 우리 집에 갈 것을 권유했다. 망설임 없이 오케이를 외치며 집으로 향했다.

역시 가는 길 집 앞 마트에 들러 와인 한 병을 사 갔다. 방에 두고 마시던 와인도 있었다.

오래된 쿠션으로 앉으면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듯한 소파에 널브러져 밤을 지새웠다.

도중에 피곤해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마커스와 폰시는 남아 술이 동날 때까지 함께했다.


이후 폰시에게 들었는데, 그날 새벽 집으로 향하던 중 소변이 많이 마려웠다고 한다. 그의 집까지는 도보 25분 정도 거리였는데 유럽 특성상 공중화장실이 없어 서성이다 집 건물에 도착했다. 간신히 참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잘 참아온 방광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황급히 바지를 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친구였다. 더 대단한 건, 그 취한 와중에도 다시 나와 뒷정리를 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미스터리한 유럽의 지린내의 출처는 폰시였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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