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창작 시 한 편을 올린 것을 제외하고는 이 곳에 글을 써 올리는 활동을 꽤 오래 쉬었다. 마지막으로 긴 글을 써서 올렸던 것은 3월 21일에 쓴 에세이였다. 두 달이나 넘게 공백기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사실 쓸 글이 그동안 없었다. 수많은 책, 수많은 영상,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많은 메시지들 중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 최근 수필의 내용이었다. 아닌 것처럼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답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정답이 있기를 바랬고, 있을 것 같았고, 잘 찾아서 모범생처럼 따라가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았지만, 강박과 혼란들도 못지 않게 많이 얻게 되었다. 최근 에세이는 그간의 여정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런 강박들을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후련했다.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공허했다. 허무했다. 내 사고 활동과 집필 활동의 이유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이유라기보다는 주제나 소재가 사라진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어지러운 생각을 좀처럼 멈출 수 없는 삶을 몇 년을 살았는데, 잡생각이 놀라울 만큼 줄어들었다. 고민이 줄고 현재에 집중하는 측면이 생긴 것은 긍정적이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허무했다. 허무주의에 빠질 것만 같았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기에 많은 경우에 이래도 저래도 괜찮다는 긍정적인 바이브의 메시지는, 이래도 저래도 별 의미 없다는 염세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난 자유를 찾은 것이지, 그토록 싫어하던 허무주의와 무기력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속으로 종종 되뇌었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열심히 뛰다가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내심 불안했다. 한편으로 무기력하고 허무했다. 강박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했지만, 어디로든 가도 된다고 하니 막상 갈 곳을 몰랐다.
내가 싫어하던 허무주의에 대해 어느 날 검색해보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다시 허무주의에 맞닿은 감정 상태를 지속적으로 느끼게 될 줄 몰랐다. 그때보다 노력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알량한 우월감이나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당시의 나는 과연 더 나아진다는 기준이 뭔지, 그런 건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지 혼란과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늪에서 나오려면 허무주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낙관적 허무주의에 대한 지식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시청 경험만으로는 잘 극복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곳 브런치 스토리에서 허무주의에 대해 한 작가님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굉장히 인상적인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그 작가님이 인용한 심슨의 펭귄 에피소드였다. 펭귄의 삶, 그 속에서의 그들의 노력은 의미 없다고 말하는 바트, 펭귄은 적어도 그 과정에 몰입하고 즐길 줄 아니 펭귄의 삶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리사, 바트에게 생각은 그만하고 빙하의 미끄럼틀을 즐기라며 미는 호머, 훗날 그러한 순간의 기억들을 회상하며 웃는 바트. 그 짧은 에피소드 요약본을 보며 감동적이기도 했고, 스스로가 웃기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저런 지식들을 쌓고, 많은 고민들을 해왔지만 나는 어린 아이들보다도 삶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쿨병vs과몰입’이라는 토론 주제를 본 적이 있다. 당시 토론의 논조와 맥락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주제가 생각이 났다. 순간에 충실하지 못하고 몰입하지 않으려 거리를 두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의 방어기제였다. 사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아이때와 같은 맥락으로 매 순간에 충실하게 살 수는 없다. 청소년기를 지나고 성인기를 지나가며 책임감과 외부 자극은 점점 커져간다. 마냥 충실했다간 활화산같이 뜨겁거나 얼음장처럼 차가울 감정의 온도들에 크게 다칠 수 있다. 때문에 그러한 자극과 감정들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여러 방법들을 익혀나간다. 한 발 떨어져서 보고, 때론 그 이상의 거리로 물러나 관조적인 태도로 삶을 바라보고, 알고 있는 이론과 지식들로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 자극과 나의 감정들을 다루기 위한 나의 방식이었을터다. 일종의 쿨병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에서 경고하듯이,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묻어둔 것은 그 양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문제를 일으킨다. 이 또한 머리로는 지겹게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전은 다르다. 그걸 이번 계기로 정말 절절히 ‘체감’했다. 지식들로 고통과 불행들을 틀어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틀어막으면 안되고 적절히 마주하고 해소시켜야 한다는 지식들은 내심 외면하며 써먹지 않기도 했다. 몸에 알 수 없는 신체화 증상들이 나타나고, 허무주의 문턱에 와서야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성숙한 사람이고 싶어서, 쿨한 사람이고 싶어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나는 내 역량 밖의 수준으로 일상에서 덤덤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만큼 성숙하지도 않고, 쿨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으면서. 내 솔직한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그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욕심과 마음가짐들을 노력이라 믿었다. 물론 노력일 수도 있다. 근데 그 방식이 맞냐 물으면,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다. 진심이 아닌 것들을 계속 흉내냈으니까 말이다. 쉽사리 판단하면 안되고, 작은 일에 짜증내고 화내서는 안되고, 고난 앞에서 꺾이면 안되고, 고진감래와 전화위복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고, 후회하면 안되고, 불평 불만은 되도록 하면 안되고…. 그런 가치들을 무턱대고 ‘흉내’내고 싶어 택한 방법이 쿨병이었던 것 같다. 겉모습을 넘어서 그냥 내가 진심으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컨트롤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결과물들은 자신의 발달 과업들에 충실하게 몰입하며, 깨지고 깎이고 다듬으며 얻은 사람들의 것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화날 땐 분노하고, 슬플 땐 우울하고, 후회될 땐 괴로워하며 돌아보기도 하고, 기쁠 땐 춤추듯이 기뻐하고, 외로울 땐 그냥 외로워하고. 그게 인간 본연의 충실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평정심은 너무 큰 감정의 엇나감을 방지하기 위해, 늪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하지만, 딱 그 정도의 역할이면 되지 않을까? 사실 내가 뭐 그리 고상하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그냥 내면은 엉망진창인대로 솔직하게 냅둬도 되지 않을까, 좀 티나거나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타인에 대해 예의와 존중을 보이려는 노력을 하는 선에서는 그게 더 건강한 게 아닐까. 또 시간지나 생각 바뀔수도 있고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마음이다. 지금의 내가, 그리고 미래의 나라고 할지라도 내 역량 밖의 모습들을 흉내내며 정답을 맞추려는 삶은 더 살고 싶지가 않다.
<소울>영화리뷰를 메인으로 기대한 사람들은 진작 뒤로가기를 눌렀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뺏었다면 죄송한 마음이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예전에 봤던 이 영화를 리뷰하고 싶었다. 심슨 펭귄 에피소드를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떠오른 영화였기 때문이다. 어른 동화를 쓰기로 유명한 픽사에서는 <소울>에서도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가지고 왔다. 주인공 ‘조’는 노력하는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선한 성품의 사람이지만 성인군자도 아니고 대단히 성공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고집하는 재즈라는 장르에서 뮤지션으로서 성공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초등학교 기간제 음악 선생님을 하고 있던 인물로 기억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현실을 강조하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식 교사 제안과(안정된 삶의 상징), 유명 재즈 뮤지션과의 공연 제안(본인이 쫓던 꿈과 이상의 상징, 기회)을 같이 받은 타이밍에 자신의 꿈을 쫓으러 가다가 사고로 사망한다.
픽사가 이 작품에서 가지고 온 상상의 세계는 일종의 ‘영혼들의 세상’과 지구(이승)의 연결이었다. 조는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영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잘못 가게 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 곳에서 세상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지구에서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말썽꾸러기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우열 곡절 끝에(많은 과정들이 있어 생략하겠다) 조는 ‘22’와 함께 지구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막상 꿈을 이루고 보니 알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내 다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22’는 직접 지구에서의 삶을 체험하며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된다. 조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재창조한 것과, 22가 삶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삶의 순간들에 대한 진실된 몰입이다.
조가 고대하던 그날 밤의 재즈 공연을 멋지게 해내고, 유명 밴드의 멤버가 된다. 재즈 뮤지션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일부 이룬 것이다. 하지만 조는 이전에 꿈꿔오던 느낌을 받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공연 직후, 조가 팀의 유명 뮤지션과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다.
“다음은 뭐죠?”
“내일 밤 다시와서 또 하는거지”
“평생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상상하던 기분과 좀 달라서요”
“젊은 물고기가 있었는데 나이든 물고기에게 헤엄쳐가 물었지.
‘바다라고 하는 걸 찾는데요.’
‘바다?’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어.
‘여기가 바다야.’
젊은 물고기는 말했지.
‘여기? 이건 그냥 물인데. 내가 원하는건 바다라고’
내일 봐.”
-영화 <소울> 中
삶의 정수는 무엇을 쫓든 그 목적지에 있지 않는 것 같다. 목표든, 의미든 무언가를 쫓는 것은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해주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무기력과 허무주의에서 멀어지게 하고 삶에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를 다양한 측면에서 성장하게도 한다. 다만 그 목적지에는 우리가 기대한 어떤 엄청난 의미가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조와 22는 뉴욕 시 한복판에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 낙엽을 구경하던 찰나의 평화롭던 순간에서 안식과 행복을 느낀다. 그 안식과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순간들만 계속된 삶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터다. 긴박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는 바쁜 일상 가운데 주어진 잠깐의 여유이기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값지고 달콤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것이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순간들이고 삶의 의미들이다. 또 조에게는 어머니와 가치관의 차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갈등을 해결한 과정 역시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치열하게 원하는 것을 쫓는 순간들, 잠깐 멈춰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느끼며 쉬어가는 순간들, 나와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는 순간, 화해하고 유대감을 느끼는 순간들, 모든 순간들이 신기하게도 서로가 있기에 더 값지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결국 각기 다른 순간들에 솔직하고 충실할 때 끝까지 미숙하고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심슨에 나온 펭귄들과 바트처럼, 소울에 나온 조와 22처럼 따지고 보면 별 볼일 없는 사건들과 사소한 감정들에 솔직하게 몰입할 수 있는 용기를 이전보다 가질 수 있기를.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혹시 나와 비슷할 누군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