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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시선

영화 - <슬픔의 삼각형>, <애니멀 킹덤>, <서브스턴스>, <조커>

by 새벽녘

인위적 노력으로 초연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에 회의적이다. 감정은 자연 발생적이라고 생각한다. 의지가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벌어지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뒤늦게 그 현장에 와서 수습하는 일이 아닐까. 못본 척하거나 구석으로 밀어넣어 억압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일 수도 있겠으나, 그게 초연함이라고 우길 수 있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인간이 살면서 초연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 무엇일까. 첫번째는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생존과 생계에 대한 것일터다. 그 다음은? 아마 타인의 시선이 아닐까. 요즘같이 진화 심리학 지식을 유튜브 영상만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인간이 평판에 매우 민감하게 진화했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영역처럼 보인다(내가 과학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기질에 따라 얼만큼 신경쓰는지가 갈리는 것 같기는 하다. 상대적으로 적게 신경쓴다고 해서 그러한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때는 노력으로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들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그랬던 때도 있었다. 미래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렇다. 노력과 의지로 일시적인 ‘척’은 할 수 있어도, 그건 마치 언젠간 해야 할 방학숙제들을 미루면서 당장 할 일이 없다고 믿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실망하고 체념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현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점점 초연해지는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마음만 먹으면 의지대로, 지식대로 그렇게 할수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들 말하듯이 운동 후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되면 근육이 자라듯이 그렇게. 그런데 운동도 무리하게 하면 안되듯이, 요즘엔 피할 수 있는 시선들은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회피하면 안된다고, 다 마주하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굳이 안겪어도 되는 것들을 겪기도 하지 않나. 원래 훈련이란게 몰아붙이고 무리할수록 좋아보여도 때때로 그 부작용은 쉽게 간과하듯이.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 간략히 리뷰해보고 싶은 영화들은 이 ‘남의 시선’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게 그렇게 쉽게 해결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이런 영화들이 계속 나오지도 않겠지. 어린애들한테 교훈 주는 만화영화들 정도에서만 이런 주제를 다루고, 어른들이 보는 영화에서는 다룰 필요조차 없겠지. 유치한 으쓱함과 우월감, 비참한 모멸감과 창피함, 수치심 그런 것들. 평소에 굳이 불편하게 대화 주제에 올릴 필요는 없지만, 사실 모두 내심 알고 있는 우리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것들. 이걸 예술가들이 끄집어서 잘 다룰 때 우린 관심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뻔히 사회에 떠다니는 이런 것들을 못 본 척하고 나아가 없는 척하는 예술들은 생명력을 잃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슬픔의 삼각형.jpg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슬픔의 삼각형>은 웰메이드 블랙코미디라고 소개를 받아 보게 되었다. 그 소개가 적절한 소개라고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생각했다. 웃긴데 그 웃음이 씁쓸하고 불편하다. 뭔가 두 번 보기는 괜히 거북한 느낌이 드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희망을 다루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사회의 불편한 부분들을 그저 ‘보여준다’.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관찰시킨다. 그 중 일부는 나이기도 하고 내 주변 사람이기도 하기에 마냥 남일인듯이 깔깔 비웃을 수는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직관적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우리는 이 삼각형을 없앨 수 없겠구나’. 누군가는 이걸 책임감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완화시키려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드려는 생각을 해야지 포기하면 안되지 않느냐고. 근데 글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한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이런 일들의 근본은 인간 사회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와 고찰들,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걸 지적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이 모였냐에 따라 위로 올라갈 사람들과 아래에 있을 사람들은 정해진다. 누군가에겐 기회가 가는 것이고, 보통 그걸 포기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다만 괜찮은 사람들이 많은 괜찮은 삼각형들은 우리 사회에 꽤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더 할 나위 없이 불쾌한 삼각형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그런 불쾌함의 영역들을 정말 잘 캐치해서 보여준다. 외모, 젊음, 돈, 지위, 운동신경, 생존능력 등등… 당신의 무기는 무엇인가. 그 무기가 발휘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어디인가. 그 무기로 삼각형의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사양할 이유가 있겠는가? 만약 올라가지 못하고 삼각형 아래에 머문다면 그 비참함을 당신은 견딜 수 있겠는가?


애니멀 킹덤.jpg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애니멀 킹덤>은 <슬픔의 삼각형>보다는 덜 보편적인 범위의 아픔을 다룬다. <슬픔의 삼각형>은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다 불편할 만한 부분을 건드렸다면, <애니멀 킹덤>은 ‘남들과 다르다’ 혹은 ‘달라졌다’는 이유로 핍박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설정인데, 동물로 변하면 사람들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격리조치가 된다. 주인공 에밀의 어머니가 그 바이러스에 걸려 격리조치 된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잊기 어려운 장면이 에밀이 자신이 그 바이러스에 걸린 사소한 증상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장면이다. 불안에 떨며 다급하게 몸을 살피고, 거울을 살피고, 호흡은 가빠지고… ‘내 일’이 아닐 때, ‘남의 일’일 때 우리는 좀 오만할 수 있다. 혐오, 동정, 무관심, 외면이 섞인 그 미묘한 마음. 그게 다 잘못된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인간이 신경쓸 수 있는 범위, 발휘할 수 있는 공감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게 나의 일이 될 때다. 안타깝기도 하고, 좀 거부감이 들기도 했던 그런 일을, 나는 겪게 될 것이라 생각해보지 않았던 비극을 갑작스레 내가 겪게 된다면? 내가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은 우리네 삶에 때때로 침투해온다. 그건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 내면이 단단해지는 성숙의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각종 부당한 평가나 무시, 부조리, 폭력 등을 당하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의 어떤 가시적인 특징이 다수와 다르다면, 그 다수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다름은 쉽게 혐오의 이유가 된다. 틀림과 다름은 좀처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저마다 느끼고 생각하는게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겐 모호해 보일 수 있고, 누군가는 그 반대 입장에서 분명한 의견을 표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사람 안의 가치관은 정립되는 순간이 있을지언정, 사회적 갈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존중하고, 무엇을 교정해야 하는지. 남의 일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얼마나 고려하는지. 어떤 건 개성이고, 어떤 건 잘못인지. 수많은 목소리들 속에 정의감과 이기심의 비율은 어느정도일지. 나 또한 때때로 어떤 기준은 공감가지만, 어떤 기준은 부당한 폭력이라고 느끼곤 한다. (사실 이 영화의 갈등 구조는 이렇게만 해석하면 너무 단순하게 축소해 보는 것일 수도 있긴 하다. 영화에서 바이러스에 걸린 이들은 원치 않은 변화를 겪은 또 하나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공생이 어려운 상황에서의 딜레마 또한 잘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쓰는 글의 주제는 명확하니, ‘타인의 시선과 차별’의 비유로만 해석해서 써봤다.)


서브스턴스.jpg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서브스턴스>는 타인의 평판에 대한 집착을 잘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애니멀 킹덤>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면들로도 풍부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인 것을 알고 있으나, 오늘은 주제에 맞게 간단하게만 다루고 싶다. <서브스턴스>를 보면서는 ‘타인의 시선은 참 인간의 삶에서 양날의 검이구나’를 느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타인에게 무시받을 때, 모멸감을 느낄 때 흡사 지옥을 경험한다. 반면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좋은 측면으로 관심받는다고 느끼고 인정받을 때 거의 천국을 경험한다. 사실 대처를 어떻게 하느냐, 또 정도의 차이가 어느정도냐에 문제지 우리 모두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외모와 젊음에 집착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쉽게 말을 뱉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집착하는 부분들이다. 그녀가 집착하는 것은 관심과 사랑, 인정, 찬사들이다. 내 추측으로는 배우로써 빛나는 전성기를 누렸던 엘리자베스는 그 시절을 계속해서 잊지 못하는 것 같다. 한 때 관심과 찬사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빈공간을, 공허함을 더욱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별로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도 않기는 하다. 스타가 된 후 주어졌던 꽤 긴 시간동안, 자기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중심을 세우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타인의 인정에만 의존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영화에서 질문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집착이, 심각한 강박이 과연 누구 탓인가? 엘리자베스의 미숙함만을 탓할 수 있는가? 다른 미숙한 자들이, 또 무례한자들이 만든 압박이, 사회적 분위기가 초래한 측면이 정말 크지 않은가?’

이전에 ‘수치심 다루기’라는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내용인 것 같은데, 인간은 정말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것 같다. 특히 부정적인 것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다시는 경험하지 않기 위해 그 평가한 이들의 가치관을 내면화한다. 사실 영화 시작부분에서 엘리자베스는 상사로부터 매우 무례한 말을 들으며 해고까지 당했으니, 느꼈을 비참함, 슬픔, 분노가 어느정도 였을지 짐작할만하다.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초반부의 상사의 뒷담화 장면을 보고 그 공기까지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경험들 끝에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와의 약속은 화장을 고치다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해서 본 사람이라면 이에 이런 질문을 다시 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게 이 사람 탓인거야? 사회의 시선 때문 아니고?’


조커.jpg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조커>시리즈는(1,2) 그 질문을 가장 거친 방식으로 다루는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2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 영화가 결국 ‘사회의 부당하고 차가운 시선 때문에 본인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 안된다’라는 메시지를 우화처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그 메시지로 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모멸감들 속에, 폭력의 아픔속에 개인의 책임은 어느정도인가. 개인은 어디까지 노력해야하는가’

<조커1>만 개봉되었을 때만 해도, 실제로 범죄 정당화 논거에 쓰일 수 있다며 많은 논란이 된 것을 알고있다. 분노가 원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는 절대 이어져서는 안되기에, 또한 그 분노 표출의 대상이 원환 관계 당사자에게 향하더라도 사적제재라는 것이 허용되면 사회적으로 정말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우려와 지적도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커2>에서 결말을 비극으로 하지 않았겠냐는 추측 댓글을 보고 그럴싸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주인공 아서가 주변인들에게 ‘사람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실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시작이다.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도, 누군가는 그런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성장과정에서 많이들 봐왔을 것이다. 오며 가며 안타까워하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린 각자의 인생에서 버거운 것들이, 신경쓸 것들이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멸감을 수시로 경험해야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피부로 와닿는 현실이다. 앞서 다룬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들은 그녀에 대해 쉽게 평가하고 말하지만, 그녀의 감정과 아픔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적어도 영화에 나온 인물 중에서는 그나마 오랜만에 마주친 동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조커>의 아서는? 그를 치켜세우는 듯하던 할리퀸과 수감자 역시, 그 ‘조커’라는 캐릭터에 이입했을 뿐, 아서라는 인간의 상처와 삶에는 관심이 없다.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기행들에 좋은 평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방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는 마땅히 답할 말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저 개인이 잘 노력하고 이겨내라는 말 외에는, 다소 무책임해보이는 그 말 외에 대체 어떤 말을 달리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늘 다룬 영화들처럼 다크한 면만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따스하고 평화롭고 희망적인 부분들도 있고, 이를 다룬 예술(영화, 음악 등등)도 많다. 다만 이런 다크한 면들은 인간 사회의 분명한 일부이고, 어떻게 보면 속성이기도 하다. 나는 미시적으로 보면 꽃길도, 거시적으로 보면 유토피아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냥 안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상처 받은 기억이 불편해서, 때로는 상처 준 기억이 불편해서 돌아보고 알아가려는 것이 분명 불편하고 쉽지 않은 길인 것 같다. 교과서적인 문장들은 분명 그 힘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몰입하고, 보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영화, 문학)을 나는 계속 다루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실 애초에 타인은 내가 바꿀 수 없고, 그러려는 것도 오만아닐까 싶다. 어찌보면 이 글도 써서 이 곳에 올리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나 혼자 씁쓸하고 되뇌이고 정리하는 그런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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