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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분열을 멈출수가 있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보고.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든 생각

by 새벽녘

이 무시무시한 영화가 마냥 영화 속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 자체가 그런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든거겠지만. 이건 비단 영화의 배경인 미국의 일만도 아니고, 내가 사는 한국의 일만도 아니다. 그냥 미디어와 통신기기가 연결된 전 지구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요즘을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대혐오의 시대에 살고있다는 표현을 이젠 다들 당연하단 듯 무감각하게 뱉는다. 근데 사실 인간의 본성이 딱히 이전 시대와 달라져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본성도 도덕성도 지능도 긴 기간동안 크게 변한게 없지 않을까? 현대인이 원시인의 뇌를 가지고 현대 사회를 사느라 겪는 고충 사항이나 쉽게 범하는 오류에 대한 내용은 종종 접한적이 있다. 더군다나 지능은 실제로 별 변화가 없다는 연구나 기사들도 서칭하면서 본 기억이 있다(아니라면 이 문장을 무시하거나 지적해주길 바란다). 달라진 것은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타인을 혐오해왔다. 혐오하고 싸워왔다. 피로 얼룩진 역사 일부(어떤 것들은 이익 문제가 더 주요했을 수도 있으니)가 이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국가, 문화권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거나 이전에 비해 사실상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 발달된 통신 기술로 인해 익명으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정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모두가 자기의 입장, 생각,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작금의 ‘혐오의 시대’를 이끌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꼭 지금의 세태들을 이전보다 ‘더’ 부정적으로 봐야할지는 의문이다. 사실 난 더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이전에는 본인들끼리 모여서 뒷담화만 할 수 있던, 힘이 없어 그 정도의 의사표현만이 허락되던 이들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공론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입밖에 내놓지 못하고 쉬쉬하던 불편한 부분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놓고 논의하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부분들은 긍정적이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평화와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입막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발언의 자유가 놀라울 만큼 많이 주어지게 되었음에도,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혐오의 시대가 버겁다며 한숨 쉬게 되었을까? 뻔한 지적이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것들이라고 본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대화를 나누는 것 이전에 그냥 그들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엄청난 피로감이 유발될 때가 많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어떤 사고 체계로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해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반감, 혐오감과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이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찾게 만든다. 그렇게 회피하면 안된다고 누군가는 비판할 수 있지만, 나같은 경우는 인간이 그렇게 올바르고 강인하기만 할 수 있는가 의문스럽다. 사실 그리고 이는 좋게 작용하면 연대가 될 수 있다. 혼자였으면 못했을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반대로 나쁘게 작용하면 각자 본인들만의 세상을 견고히 구축하게 하고, 강한 이기주의들을 만들어낸다. 연대 자체가 양날의 검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 알고리즘 시대와 맞물리면 그 어느때보다 확증편향에 빠져들기 쉽지 않은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지금 많은 부분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가진 어떤 생각들이 소신인지 확증편향의 결과물들인지, 그 구분조차 희미해지고 힘겨워진게 현 시대가 아닌가. 이런 혼란들 속에서 우린 점점 더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을 많이 느끼게 되지 않을지, 그게 우려스럽긴 하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다고 싸우지 말고 다들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정말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평화와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입막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인간은 완벽한 적이 없다. 세상 또한 그렇다. 안그래도 불완전한 인간들인데 사회를 이루어 모여산다. 모여사는 것도 모자라 각자 저마다 다른 집단, 정체성, 경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저마다 다른 성격 기질, 심지어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저마다 다른 뇌구조을 가지고 살아간다. 안그래도 입장과 가치관이 다를 서로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이해관계는 계속해서 충돌하고, 힘의 논리에 따른 부조리, 차별 등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애초에 그런 일들을 예방하면 되지 않냐는 것도 좋은 시각이자 지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계가 명확하다. 욕망 앞에 다들 초연한 호모 사피엔스 시즌2를 만들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 문제는 계속해서 생기고, 불만들도 계속해서 생기고, 싸움도 계속해서 생긴다. 이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기술은 발전하고 공개된 곳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그건 앞서 말했듯 명과 암을 모두 동반한다. 그 갈등들은 우리의 머릿 속에 자리잡게 되고, 각자의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어떤 마땅한 해결책을 못찾은채 사회는 계속해서 분열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열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이 끔찍한 것 알겠고, 극으로 치달을수록 이런 폭력들이 생길 수 있겠구나. 그런데 지금 세상을 보면, 글쎄 이 분열을 막을 수가 있나? 일례로 무례한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만연하다며, 무례한 시대가 싫은 이들이 일어나서 세상을 좀 바꾸니, 예민한 시대가 싫어진 이들이 다시 세상을 바꾸려 들지 않는가. 이걸 헤겔의 정반합으로 봐야하나. 세상이 늘 그런 식으로 변화하든 발전하든 해왔던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혼란스러운건 변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는 빨간 안경 군인(실제 군인이 아닐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정확한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다) 장면은 실로 섬뜩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범위의 내집단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살하는 태도는, 그 범위 밖의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죽어도 마땅하다’는 표현은 상당한 수준의 부조리를 보고 감정이 격해진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기도 하는 표현이지만, 그 말이 현실화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다년간 경험해왔다. 정말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기준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가끔은 예상치보다 더 달라 놀랄 때가 있다는 것을. 분열의 시대에서 살며 때때로 나는 정말 상식과 보편성이라는게 있는지, 그런-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 있는-의문까지 들었었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에게 ‘죽어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사람마다 다를까? 지금 활자를 적으면서도 섬뜩함이 가시지 않는다. 또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차라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게 나은 위험한 존재로 취급할 수 있는가? 생각만 그렇게 하는 거야, 솔직히 많은 이들이 그래봤으리라 싶은데, 앞으로 분열이 훨씬 더 극단적으로 심해지면 이를 현실화하려는 사람들이 실제로 늘어날 것인가? (설마 싶긴 하고,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해 관용적일 것인가? 관용적이라면 어떤 주제에서, 어느정도까지는 자신과 달라도 괜찮다고 볼 것인가? 스산하고 씁쓸한 질문들이 머릿 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나타난다.


결국 의견 충돌이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 방식이 이런 극단적인 폭력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런 영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폭력이 아닌 대화를 하긴 해야하는데, 그 대화를 어떻게 해야할까.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규정짓는 분노와 체념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좋은 해결책은 우리 곁에서 더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도 고상한 소리를 남에게 하기엔 그저 그 소용돌이의 일부일 뿐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내가 별로 똑똑하지가 않아서, 지금은 덜 극단적이고 덜 폭력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들도 있기를 바랄 뿐, 어떤 이상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도 없는 것 같고 바라지도 않게 된 것 같다. 이러한 태도를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판할 수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책임한 태도 보다는 무책임한-실현 가능성 없는 해결책이 더 싫은 것 같다. 아무래도 다른 영감을 받으려면 휴머니즘을 좀 더 느낄만한 작품이나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이상의 생산적인 감상은 현재의 나에게는 바라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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