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냥 화나고 우울해도 돼-<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1

줄거리 얘기는 거의 안하고 내 생각 위주인 리뷰1

by 새벽녘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우울은 나에게 큰 숙제 같은 것이었다. 나는 큰 비극이 없어도 쉽게 가라앉고 우울해지곤 했다. 나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가항력 같은 것이었는데, 그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을 때도 있었고, 다소 버티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를 많이 힘들게 한 것은 우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긍정적 사고에 대한 찬사와 강조가 만연한 것은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이에 반발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변호는 그 때도 있었고, 점점 많아지는 것 같기는 하다. 다만 여전히 상대적으로 대중적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부호가 남는다. 나도 긍정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용하게 쓸 때도 많다. 하지만 이게 도구가 되지 않고 매사에 적용해야 한다는 가치관이-때로는 강박이 되어버리면 어떨까. 어쩌면 필연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다소 죄악시하게 된다. 자기계발서, 철학서들에 꽂혔던 때가 있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희망찬 문장들에 감동을 받고, 그런 가치관들을 내면화하고 싶어했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힘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류의 그런 문장들 말이다. 인사이드 아웃 같은 영화도 보고, 감정들을 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글들에 감명을 받기도 했지만, 그 힘은 긍정적 사고에 대한 동경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혼란 속에서 나에게 분노와 우울은 벗어나야 할 무언가였다. 되도록 가까이 가서는 안되는 것들이었다. 강인한 정신과 건강한 가치관만 있으면, 그에 대한 의지만 있으면 나의 내면은 훨씬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는데, 굳이 그런 우중충한 곳에? 말로는, 생각으로는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고 종종 말하곤 했지만, 정말 솔직한 나의 내면에서는 그런 마음들을 비난했다. 분노와 우울은 내게 한심하고, 유치하고, 나약한 것들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더욱이 싫었다.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이 당시의 나에겐 최선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이 나는 그런 시기에도 우울한 감성의 예술들을 놓지 못하였다. 우울한 음악, 시, 영화, 문학을 계속해서 향유했다. 그냥 좋으면 좋은건데, 사실 때로는 심플 이즈 베스트인데 성격상 또 스스로 따져물었다. 왜 이런걸 좋아하나, 이런걸 좋아해서 남는건 무엇인가, 이런게 내 삶을 나아지게 만들 어떤 명확한 교훈을 주나? 스스로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 감성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주 즐겼다.


혹시 이전의 내 글들을 읽어 본 독자들이 있다면 알겠지만, 결국 나에게는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조언들에 한계와 염증을 좀 느끼는 시기가 왔었다. 그제서야 명확한 교훈을 주지 않던 수많은 우울한 작품들에 대한 찝찝함이 해소되었다. 그냥 인생 자체가 너무나 모호하다. 세상도 사람도 모호하다. 문학은 이를 정리하지 않는다. 정리하려는 학문들이, 메시지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사실 세상에 도움이 될 때가 많지만-그것들 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설, 모순, 모호함이 가득한, 카뮈 말을 빌리면 부조리가 가득한 이 세상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리고 사실 슈퍼맨도 초인도 되기가 너무나 어려운 인간 내면의 유약한 한계를 인정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는 하기 어려웠던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정말 이상한 동물이라서 자신의 분노를 버거워하지만 거기서 동기부여와 활동력을 얻는다. 우울을 싫어하지만 그 감정 속을 헤엄치며 치유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내심 즐기기도 한다. 분노와 우울에서 시작된 어떤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순간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성, 합리성과는 어긋나는 감정적 선택을 과감히 하기도 한다. 그냥 그런게 인간의 삶이다. 모두에게 강요할 가치도, 의미도, 목적도, 기준도 없다. 그러니 분석만으로는 정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문학은 별의별 종류의 사람과 삶의 예쁘지 않은 모습들, 수많은 모순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그저 관찰시킨다(주제의식과 의도가 명확한 종류의 작품들도 물론 있지만). 무엇을 느끼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 감상은 삶의 경험에 대한 감상과 비슷하게, 누군가에게 빌려온 말이 아닌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된다. 그리고 시와 음악은 멋있다고 칭찬받지 못할 감정들을 그저 솔직하게 아름다운 예술적 형식 위에 풀어낸다. 어떻게 보면 우린 너무 멋진 것들 앞에서는, 그에 맞는 강직한 기준들 앞에서는 숨막힘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들을 동경하고 예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반면 그저 솔직한 마음들 앞에서는 무장해제되고 치유받는다. 이런 것들이 내가 현재 생각하는 우울한 예술들이 가진 힘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픈 것을 직시하지 못한 자는 타인을 공감하지 못한다. 이건 나 또한 그랬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아파보지 않은 자는 공감하지 못한다. 유치해보지 않은 자는 충실할 수가 없다. 타인의 시행착오와 부정적 감정을 못 견딘다. 자기 것이 아님에도 바로잡고 고쳐주고 싶어 안달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른 옆에서 해결해줘야 하는 것이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과정에서 난 이런 것들쯤은 이렇게 쉽게 버티고 털어낸다고, 그런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타인의 분노와 우울을 다소 한심한 것으로 본다. 인간다워 본 자가 타인의 인간적인 가치를 존중해줄 수 있다.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의 후반 구절들을 읽다가 새삼 다시 생각해 본 지점이다. 그리고 지난 날의 내 언행들을 반성하게 되기도 했다.

인간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런 인간다운 감정들은 죽을 때까지 느끼고 산다. 그 이유와, 느끼는 양상들은 변화하겠지만. 그런 감정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루는 작가가 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작가, 최은영 작가이다. 최은영 작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포착하는 것에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것 같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인물들,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을 다루는데, 이들의 내면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직설적이다 못해 자극적이다.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마저 적나라하다. 이전에 <내게 무해한 사람>과 <쇼코의 미소>라는 단편집을 감명깊게 읽었고, 이번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을 다 읽기 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단숨에 다 읽지를 못했다. 솔직히 말해 좀 버거웠다. 제목에 이끌려 <답신>이라는 단편부터 봤던 것 같은데, 화자가 겪은 비극과, 그로부터 감당했어야 할 아픔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를 간접체험 한 후 밀려온 감정의 파도가 버거워 다른 단편들을 읽기를 미뤄왔었다. 이후엔 생각이 날 때 마다 한편 한편씩 더 읽어 나갔고, 최근에 와서 마지막 단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까지 완독하게 되었다.


이 단편들을 읽다보니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오롯이 독립적일 수는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휘둘리지 않으려는 시도는 유의미한 것이지만, 결국 꿈꾸는 만큼 이상적으로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인물들의 고통의 핵심은 결국 타인의 말과 눈빛, 심하게는 폭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결국은 현실에 대한 반영이지 않나. 우리는 때론 삼키고, 때로는 터뜨리고, 때로는 체념하며 다루어 내려 노력할 뿐이지, 정말 타인이 유발하는 감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마인드 셋이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본능처럼 피어오르는 마음들을 다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아예 모른 척하고 싶은 그 마음들이 솔직한 나의 인생이기도 하다.

<일년>이라는 단편은 주인공이 다희라는 회사 후배와 겪은 에피소드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 중 주인공은 다희에게 어린 시절 아픈 에피소드 중 하나를 털어놓는다. 소풍 때 다른 애가 자신을 때리고 필통을 뺏어가서, 할머니에게 그걸 말했더니 할머니가 그 애 엄마와 싸운 후 자신의 필통을 찾아 돌려줬다는 얘기. 그 과정에서 그 애 엄마는 ‘어쩜 노인네가 저렇게 못되게 늙었대?’라는 말을 하고 할머니는 이에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늙었다, 왜! 이 … 씨발년아’로 받아쳤다는 얘기. 이후 주인공이 당시를 회상하며 한 말이 모든 단편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 때 할머니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말로 일격을 가하고 싶으면서도 겁먹은 게 제 눈에는 보였거든요. 씨발년아, 라고 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꼭 울 것 같았어요. 욕도 못하는 사람이 최대치의 욕을 한 거죠.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 것 같고. 세상 소심한 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했고.


읽는 순간 먹먹하고 찡했던 구절들이다. 우리는 살면서 나도 그리 강하지 않은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특히 나보다 약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어울리지 않게 강한 척하려고 애쓰고 노력할 때가 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선택을 안했을 것 같은 할머니가, 손녀를 위해서는 겁나는 걸 다 티내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이를 대신해 줄 다른 강한 보호자가 없다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유발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손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게 해 애틋함과 감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손녀입장에서는 애 눈으로봐도 그런 마음들이 다 보이는데 입 밖에 꺼내어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하지만 할머니에 대해 감사함과 안타까움과 같은 다소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는 것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잘 안어울릴 것 같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정리안된채 떠다니는 것이 삶의 순간들이다. 당연히 삶에서 좋은 순간이라고도 예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억 속에서는 삶의 이런 순간들이 강렬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다희 같은 후배와 나누는 것이 의미가 큰 순간들로 남기도 한다.

<일년>이라는 단편은 주인공과 다희가 단순히 회사 선후배라는 관계의 시작을 지나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가 된 후, 몇몇 오해들과 달라진 삶의 궤적들로 멀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다룬다. 멀어지지 않는 방법이 있었을까. 제시할 수 있는 조언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답들은 맞을 수도 동시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몇몇 순간의 용기가 관계의 지속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너무 어려운 사람이, 또 그게 너무 어려운 시기가 있을 수 있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다는 것은 그 옷을 입지 않아 감당해야 할 고통보다 더 크기가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또 10년 후에는 어렵지 않게 할 일을, 그 10년 전에는 때려 죽여도 도저히 하기 어렵기도 하다. 쉽게 뭔가 맞다 틀리다 할 수 있을까, 이랬어야 했고 또 저랬어야 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런 작품들을 읽다보면 내심 마음이 숙연해지며 답을 찾기가 어렵다. 그냥 이런 일과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그 마음들에 공감할 뿐,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좋기도 하고, 좋았기에 아프기도 했던 그런 순간들이 그저 다 삶의 일부들이기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근데 이 분열을 멈출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