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끝내 이해받지 못하는-<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2

by 새벽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이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본 적 없는 것 같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것이, 예민한 본능들이 타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해본 적이 많다. 살면서 타인에게 잊지 못할 위로나 감동, 어떤 응원의 에너지를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좀처럼 잊기 어려운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나 자신 또한 타인에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줬을 것이다.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친밀감을 느끼고 이해받고 싶어서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뜨거운 것에 손을 덴 듯 뒤로 물러나게 된다. 반복이 되면 손실 회피 성향이 고개를 들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또 관계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접기는 어렵다.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환경도 다르기에 이 딜레마에 대한 대처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어쨌든 여러 사람을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나다 보면 적어도 그 환상은 깨지는 것 같다. 나와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나 감정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전혀 다른 감상이나 가치관을 보이게 된다. 다르다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들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관계들도 있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예민한 부분들을 건드려 이내 갈등으로 번지고 마는, 혹은 마음을 닫게 만들고 마는 관계도 있다.


KakaoTalk_20250623_145933755.jpg


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몇몇 단편들은 그런 관계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이해받고 싶지만, 상대는 나와 다른 사람이고, 또 다른 입장에 있어서 좀처럼 이해해주지 않는 순간들. 이해해보려고 하고 추스려보려 해도 그 방법이 늘 통하지는 않는다.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쓸쓸함과 비참함이 좀처럼 잘 눌러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나 또한 그 사람을 이해해주지 못하면서 이해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 한 것이, 나를 포함해서 내가 관찰한 사람들 대부분 다 그런면이 있던 것 같다(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멋있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한다면, 뭐 어쩌겠는가. 때론 견디기 어려운 모순을, 그로 인한 감정과 생각의 파도들을 다루어내려 애쓰거나 같이 휩쓸려야지. 아니면 그냥 그 바다에서 멀리 도망치거나.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화자 희원은 편입해 들어온 대학에서 만난 한 강사를 동경한다. 그 강사의 말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글을 쓸 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서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말에도 영향을 받는다. 희원은 사회적 상황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꼭 말하고 싶은 바를 피력하는 것에 다소 회피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이 느끼는 불합리함,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도 있고 일종의 의무감도 느끼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 조언이 더 깊게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원이 강사에게 '젊은 여자강사라서', 또 '정교수가 아니라서' 무례하게 군 학생들이 있는 것 같다고 불만이자 일종의 지지를 표현했을 때, 강사는 이전과는 다소 다른 태도의 조언을 내놓는다. 앞으로 희원씨가 겪을 모든 일을 그렇게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리고 괜히 스스로 더 마음고생 할 구실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을 덧붙인다. 희원이 강사에게 한 말도, 강사가 희원에게 한 말도 의도와는 다르게, 듣는 당사자에게는 좀 꼬여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희원은 그런 방식이 강사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어려운 시간을 견뎌온 방식일 것이라 생각하며 동의는 못하지만 이해는 한다고 했지만, 그 이해는 머리로 하는 이해였을 것이다. 자신이 내심 멘토처럼 여긴 이로부터 저항의 목소리를 숨기지 말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후의 피드백은 이와 모순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의 입장을 머리로 생각했을 때 그럴수도 있겠구나 이해하지만, 그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친구나 부모의 관계에서 이해받지 못해 실망을 느끼는 경우가 더 흔하지만, 자신이 동경하던 선배나 멘토, 스승, 롤모델한테서 비슷한 종류의 실망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은데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나를 쉽게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나를 더 응원하고 지지해주길 바랬는데, 미지근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대단하게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약한 모습을 봤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봤을 때. 요즘엔 비슷한 상황에서 '내 기대가 지나쳤던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냥 그 사람도 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 늘 강할수도 없고 옳을 수도 없고, 약한면이 있는 것이 당연한건데. 나와 다른 사람이니 나의 가치관이나 감정을 이해못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한건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고, 그 사람에게 지지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그런 순간들을 맞이할 때 혼란은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반복되다 보면,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다 맞지도 않겠지만 저 사람이 다 맞지도 않는 거구나. 그도 그냥 한 명의 평범한 사람이구나.



<이모에게>라는 단편은 굉장히 씁쓸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공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수용받지 못한 사람은 원치 않아도 자신도 마음에 인색한 사람이 된다는 내용이 너무나 와닿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고,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을 종종 봤다. 이런 현상은 전염성을 기반으로 한 대물림이나 악순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단편의 화자는 이모로부터 마음이 약해보이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자랐다. 그리고 어른들 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이모와 떨어져 지내게 된다. 이모의 지속적인 가르침과 그 과정에서 느낀 배신감까지 더해져서, 원래 그런 이모의 가르침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의 문을 닫고 점점 이모와 닮아간다. 계속해서 어려워진 집안 형편까지 겹치니, 화자는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해 점점 더 감정을 등한시 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타인에게도 엄격해진다. 그런데 자퇴를 결정한 동기가 한 '군인이 너와 잘 어울리고 너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이 없는 너처럼 살고싶지는 않다'라는 말을 듣고 내심 강하게 상처 받는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내심 그 말을 인정해버리고 만다. 살다보면 본인이 원해서, 그리고 맞다고 생각해서 판단했는데 그게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내가 원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내가 원한 것이 맞나. 어떤 압력때문에 결정한 것이면서 스스로를 속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맞다고 생각한 방향인데, 사실은 그게 아닐 수 있지 않을까. 화자가 느꼈을 혼란과 분노, 슬픔이 다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화자에게 상처받았을 주변인들 또한 이해되어서 더 씁쓸해졌다. 나 또한 살아오면서 언제는 화자 같았고, 언제는 화자에게 상처받은 주변 친구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화자 또한 이모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종류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고,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종류의 상처를 준 사람이 된 것이다.

계속 그렇게 엄격한 태도로 살다가 오랜만에 화자는 이모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모는 여전히 화자의 약한 모습에, 감정들에 차갑고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이에 화자는 실망하기도 하고,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고 차갑게 분노하기도 한다. 이모는 거기에 더해 니가 군인이 되기로 했을 때, 마음이 여린 애가 군인이 된다고 해서 걱정했다고 말을 한다.

"처음에 니가 군인이 된다고 들었을 때 중간에 관둘 줄 알았다. 네가 마음이 여리잖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해"
"너 어릴 땐 네 마음 여린 게 그렇게 불안해서 고치려고 했어"
"그럼 성공했네. 나, 마음이 돌이 됐거든."

-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253-254P

이모가 화자에게 준 것이 사랑이긴 했을 것이다. 의도는 100%, 200% 그랬을 것 같다. 이모가 살아오서 본 세상은 어땠을까. 약하면 밟히는, 약해보이면 가차없이 밟히는 잔인한 세상이었겠지. 그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조카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조카가 스스로를 잘 지키고 살길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남들에게 무시당하진 않지만 결국 스스로 또 다른 지옥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그렇게(여리다고) 생각 안한다는 말도, 마음이 돌이 되었다는 말도, 화자의 대답들은 한 없이 슬프게 들린다.

더 시간이 흐르고 화자는 사실은 이모가 남들에게 쉽게 상처 받는 여린 사람이었음을, 그렇기에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래서 그런 행동을 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의도를 이해하는 것 만으로 과연 해소가 될까. 화자는 자신이 고집스럽게 버리지 못하던 엄격함을 어느 순간 못버티고 내려 놓게 된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좋아해왔던 동기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였다.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리 엄격하게 강해지려고 해도 인간인 이상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모한테 이해받지 못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은 그래도 스스로를 놓아주고 이해해줄 수 있다는 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건, 한 번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오래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 하지만 그 해 봄에는 그 문이 더는 내 힘으로 닫히지 않았다. 슬프다거나 괴롭다는 감정보다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먼저 일었다. 처음에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책을 읽고 산책하고 샤워하고 음악을 듣고 운전하고 수영하고 일에 몰두하고 심호합을 하고 일기를 써도, 그렇게 내 마음을 '정상화'할 수 있는 모든 버튼을 누르고 조종간을 건드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침내 내가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은 한밤중에 전소한 헛간처럼 무너져내렸다.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나는 그렇게 믿었다.

-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258-259P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기남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 내내 괴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상황이 안타깝다고 해서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내가 감히 동정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감정선을 따라가니 이입이 되어 슬프고, 또 좀처럼 해결책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기남을 정말 존중하고 사랑해준 사람이 있을까? 그건 첫째 딸 진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경은 남편과 둘째 딸 우경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가족들과 멀어졌다. 나는 그 사유가 정말 그런 손가락질을 당할만한 것인지, 내 기억에 그 부분에 대한 묘사가 엄청 자세하지 않아서 판단이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손가락질한 이들이 과연 진경에 비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조차 의심스럽고, 아니 나는 그들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읽는 동안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그들 때문에 기남은 자신을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과 멀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기남에게 현 시점에서 진경과 비슷한 마음을 주는 사람은 손자인 마이클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너무 어리고 그는 앞으로 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점점 기남에게 쏟을 애정과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으로 추측되기에, 나는 마이클이 주는 기남에게 주는 사랑이 그리 큰 위로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기남이 계속해서 쓸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다. 그러면 안되는 것일까? 괴롭고 쓸쓸하고 아프면 안되는 것일까? 본인의 삶이라고 본인이 다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삶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으니, 진경과의 순간이 있고, 마이클과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으니 그 또한 정말 괜찮은게 맞는걸까. 안괜찮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나의 큰 오만이고 실례일수도 있겠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영역이니.

마이클은 자신의 엄마 우경으로부터 너무 다정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우경은 너무 다정한 사람은 기남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정한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해줄 수 없는걸까. 그들이 바보같다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지 말고, 그들의 그런 면이 좋다고, 왜 그러는지 알겠다고 좀 더 이해해 줄 수는 없는걸까. 아무리 서로 이해받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도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조금 더 베풀려고 해봐도 되지 않을까? 나 또한 그런 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지만, 그냥 이 책을 읽고나니 답답해서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세상의 기남과 비슷한 이들에게 좀 더 행복한 순간들이,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기를-그런 무책임한 마음을-한 번 품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냥 화나고 우울해도 돼-<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