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와 낙관적 허무주의
불행을 느끼고 비관적 시선을 가지는 데에 어떠한 기준이 있다고 하면, 내가 그 기준에 부합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건, 인간의 마음은 그런 기준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아서 어리석기도하고, 동시에 위대하기도 하다. 어리석은 쪽에 가까웠을지 날카로운 쪽에 가까웠을지 모를 어린 시절 내 통찰은 다소 어둡고 뾰족한 모습이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극심한 비관주의를 내면에 심화시켰다. 나를 비롯한 인간이란 존재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세상 일은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때 알베르 카뮈의 철학을 배웠다면 좀 더 생산적인 논의로 빨리 넘어갔을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엄청 반항적인 시기여서 누구의 어떤 말도 별 의미 없었을 수 있다), 어쨌든 당시의 나는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거기에 끝없이 뇌피셜을 붙여 가치관을 만들어갔다.
늪에 계속해서 빠지듯이 어두운 생각들은 점점 깊어졌다. 달리 의미있는 일은 없어보였고, 세상은 온갖 무례와 악의, 배신, 이기심, 고통으로 가득찬 것만 같았다. 나쁜 쪽으로 한도 끝도 없이 가득찬 이 세상에 나는 왜 태어난걸까. 태어나지 않는 쪽이 이득아닐까. 앞으로 탄생할 생명에 대해서도-어쩌면-그냥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이지 않을까. 원하지도 않는데 불가피한 고통의 바다 속으로 억지로 던져넣는 것이 좋은거야? 너무 경솔한 행동 아닌가? 누구한테 말은 잘 안했지만, 그런 생각을 속으로 많이 했다. 나중에 보니 이게 ‘반출생주의’라는 것이었다. 당시엔 그런 사상이 따로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로부터 굉장히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시각에는 다른 컬러들도 섞여들기 시작했다. 우울과 어두움은 무슨 내 마음의 퍼스널 컬러라도 되는 듯이, 배경색의 자리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대감, 사랑, 희망, 친절, 자긍심 같은 것들도 작게나마 저마다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고 그 방향이 썩 밝지 않은 건 여전했지만 알게 모르게 나도 조금씩 변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몇 년 지나 다시 접하게 된 반출생주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것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무슨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주제가 주제인만큼, 관련된 글의 거의 모든 댓글창들은 전쟁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상은 ‘논리로는 반출생주의를 이길 수가 없겠구나’였다. 삶은 정말 좋은 것일까. 탄생은 축복할 만한 것인가. 내가 감히 쉽게 그리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느 쪽 의견에도 진심으로 분노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도 못했고, 진심으로 찬성하고 편들고 싶은 마음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말싸움하면 반출생주의 찬성 쪽이 이길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크게 기울지 못했다고, 마음이 복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확실하게 찬성했던 이전보다 마음은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진짜 알게 모르게 내가 좀 변하긴 했나보다. 솔직히 그게 발전한 것인지 퇴보한 것인지, 둘 중 무엇도 아닌 그냥 흔하디 흔한 삶의 변화 중 하나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전보다 좀 덜 비관적이 된 스스로에게 어른스러워졌다고 으쓱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좀 좋은 일들을 더 겪었다고 얄팍하게 희망 운운하는 스스로에게 위선과 거부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왔다 갔다 느끼며 헷갈려 했다. 누군들 그런 문제에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그냥 답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던 것이, 그래서 그냥 스스로 어떻게 하고 싶냐는 것이었다. 반출생주의가 내가 생각하기에 더 깔끔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는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싶은가? 옳고 그름을 떠나 내가 그걸 원하나? 내가 그 가치관을 굳게 믿고 30이 되면? 40이 되면? 나 후회하지 않을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반출생주의를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건방지게 뭐가 맞니 틀리니 설파하고 싶지 않다,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겪어왔는지도 나는 잘 모른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부조리와 고통을 겪은 사람한테 나이브하게 ‘말로’ 이렇고 저렇고 설교할 생각 따윈 없다. 그런 부류를-일단 나부터가-정말 안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싶은지는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논리 체계보다는 직감을 믿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나한테 결국 이 주제는, 출생에 대한 논의 이전에(그건 정말 모르겠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의 문제였다. 나는 계속해서 염세주의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리 꼿꼿하고 강인하지가 않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세상 일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 마저도 실패했다. 누군가로부터 우매하다는 얘기를 들을지언정, 나는 솔직하게 타인에게 영향도 내심 쉽게 받고, 이런 일 저런 일에 쉽게 일희일비하는 쪽이 더 맞는 사람이다. 평정심보다는 기복이 더 자연스럽고 더 끌린다는 것이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성인군자처럼 마음먹는 것도 시도해보다가 그만뒀다. 반대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세상의 안 좋은 점을 생각하며 차분해지고 싶지도 않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여러 시도들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느 방향이든 평정심을 일시적 도구가 아닌, 가치관으로 가지고 살면 알록달록한 감정의 흔적들을 남기지 못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결국 내가 ‘세상이 허무하긴 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날 정말 감동시켰던 말들, 나에게 큰 영감과 동기를 줬던 말들, 정말 닮고 싶었던 사람들, 빈 틈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내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것들은 영원하지 못했다. 나를 사로잡은 말들에는 외면하고 싶지만 일리있는 반박들, 반례들이 있었다. 내가 롤모델로, 멘토로 삼았던 사람들도 인간의 유약함과 세상의 모순 앞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20대 초중반에 나는 희망을 품었다. 지독히 어두웠던 내면이 그런 말들과 가르침들로 인해, 어떤 사람들로 인해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내가 기대던 것들도 완전할 수는 없었다. 세상엔 희망도 필요하지만, 희망은 모든 걸 설명해주지 못한다. 세상 일의 운과 우연적 요소 앞에, 마음 먹은대로만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역한 본성 탓에, 하나의 토끼를 잡으면 하나의 토끼는 놓칠 수밖에 없는 특이한 역설들 앞에 ‘삶과 세상을 말로 정리하려고 한’ 여러 시도들은 힘을 잃는다. 자신만의 구체적인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자주 배신하고 비웃는다. 믿은 대로, 노력한 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허무함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영화를 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을 하기에 알고 있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가 내가 구독중인 OTT 서비스에 들어와 별 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러 보게 되었다. 나는 여러 번 다시 보지 않은 영화는 내용을 쉽게 까먹는다. 그래도 당시에 어떤 감상을 느꼈는지는 잘 기억하는 편이다. 나는 무심코 본 이 영화가 좋았다. 이 영화는 ‘적당히 인간적인 면들도 보여주지만, 더 많은 부분 들에서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다. 사연은 저마다 달라도 다들 우리네 인생 같다. 그들은 어린시절 생각한대로, 꿈꾸던대로 되지 못했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은 자주 엉망이고, 엉망인 걸 수습하려고 몸부림치다 더 엉망이 되기도 하고, 그런 시소들 끝에 체념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정신차리고 그러면 안된다고 화면을 응시하고 소리치며 혼내지도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과정 속에서도, 가지 않은 길과 그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들의 연속에도 어떻게 그런대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법을 찾아 나간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다고 느껴져 좋은 영화라고 느꼈다.
그리고 후에 이 영화의 리뷰 영상과 글들을 보며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도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 더 완성되었다. 이 영화속의 인물들이 공감된다면,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하면서 내심 느끼는 그 불안감과 허무함, 무기력함을 알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거기에 더해진 후회와 자기혐오 속에서도 결국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렇듯 ‘모든 것이 부질 없고 의미 없기에, 역으로 모든 것들이 의미있을 수 있다. 스스로 삶의 순간들에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것이 낙관적 허무주의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구체적인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 선택으로 남겨두면서, 세상의 허무한 면,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삶을 생기있게 살 수 있는 동기를 주는 이 개념이 나는 참 좋았다. 지금 시점에서 설득력을 느꼈기에 좋았다. 그 핵심 열쇠가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다정함’일지는, 동의가 되는 면이 있으면서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면도 있어 보류지만,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개념을 알게 되어 기뻤다. 사춘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발버둥 쳐봐야 어차피 다 의미없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다 의미 없다는 생각은 나를 무언가에 몰입하게 하는 것을 방해했다. 의욕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 그리는 것이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닐까봐 도화지를 그냥 백지 상태로 계속 두는 꼴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그리기를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것 보다는 이제 잘 그려진다 싶으면 좋아하다가도 잘못 그린 것 같다 싶으면 슬퍼하며 그림을 더 그려나가고 싶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리-엄청나게-대단한 일이 아닐지라도, 백지에 선 몇 번 덧칠해보다가 포기하기를 원치는 않는다.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 애쓴 흔적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갖춘 것 또한, 이제는 경험으로 느껴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때론 새까맣게 어둡게 칠했던 흔적도, 그 위에 별처럼 작게 피어난 다른 색들도, 앞으로 그리고 칠할 여러 흔적들도 웃기면 웃긴대로 예쁘면 예쁜대로 내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같이 그리기를 자주 망설여온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함께 그려보는건 어떻겠냐고 권하고도 싶다. 강요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