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에서 느꼈던 서늘함
영화 서브스턴스를 볼 때 굉장히 서늘하게 느껴졌던 장면이 있다. 영화를 본 지 좀 오래되어서 정확한 앞 뒤 맥락은 다를 수 있다는 점 먼저 밝히고 싶다. 어떤 장면이었냐면, 우선 시기는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원래 몸과 젊은 몸을 왔다갔다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통합되지 못하게 느끼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원래 몸(아마 이 때는 부작용으로 추가 노화, 그것도 부작용 답게 매우 극단적인 노화도 꽤 진행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으로 자신이 젊은 몸으로 출연한 TV 토크 쇼를 감상하는 장면이었다.
젊고 인기 많고 잘나가는 엘리자베스는 아마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저는 그냥 제가 되려고 해요. 저 자신이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않죠.
이를 본 엘리자베스는 분개한다. 자신이 한 인터뷰를 보는 것인데도 분노한다. 이미 자신의 다른 육체를 통합된 자아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부작용으로 겪는 고통은 저 젊은 몸의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아 분열이 일어나 젊은 몸을 안그래도 미워하는 상태에서 이런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는 하다. 근데 내 생각엔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대사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당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다른 몸이 한 인터뷰를 보고 느낀 감정은 ‘가식에 대한 혐오’였으리라 추측한다. ‘세상의 진실을 내심 알면서 모르는 척 말하는 가식’. 어쩌면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나이브한 통찰’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다. 그 혐오에는 물론 열등감도 뒤섞여 있다.
내가 이 장면이 서늘했던 이유는, 엘리자베스에게 거의 자아 분열에 가까운 증상이 나타난 것과는 별개로, 이게 인간의 어떤 기만적인 모습을 포착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엘리자베스가 TV에 나와서 한 말 같은 문장들을 좋아한다.
자신의 삶을 살아라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말아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의 좋은 모습, 못난 모습을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라
나는 여전히 이런 말들이 좋다고 생각한다. 깊은 통찰이 있고,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은 시기일때나, 나쁜 시기일때나 이런 가치를 놓지 않으려고 어느 순간부터 노력했다. 마음 속에 되새겼다.
하지만 내가 잘 풀리고 좋은 상황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이런 문장에 대한 직관적인 마음은 달랐다. 좋을 때는 이런 말은 많이 하고 싶기도, 듣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좀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얼마나 깊이 있는 말인지, 얼마나 많은 상황에 적용이 될 수 있는지, 누군가에겐 기만일 수 있는지 아닌지, 정말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지 등등…
그런데 내가 많이 힘든 상황일 때는 그런 의문들을 파고든다. 허점들을 발견하고 되새긴다. 그럼에도 사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이런 메시지를 놓지는 않았다. 그래도 추가로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면, 기분 좋을 때는 이런 말들을 그냥 좀 나이브하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냥 뿌듯하게 그렇게 믿고 싶어서 믿는다. 믿고 싶어서 믿고,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경향이 솔직히 있는 것 같다. 그런 통찰이 세상의 어떤 부분은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나, 누군가를 기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안 하게 된다.
자신의 여러 안 좋은 모습들, 원하지 않는 모습들을 받아들이고, 그걸 어떻게 장점화해볼 수 있을지, 자신이 가진 장점은 어떻게 살릴지, 자신의 삶을 위해 무엇을 노력할 수 있을지 고찰하고 실천하는 것은 물론 성숙한 태도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성숙한 태도’와 ‘각자의 길’, ‘개성’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주는 무언의 압박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만연한 불공정을 논하기 어렵게 만드는 압박감을 주지 않는가? 인간이라면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억울함이나 분노 같은 것을 ‘미성숙한 태도’라는 말로 지긋이 눌러 표현할 수 없게 만든 점들도 있지 않은가?
원래의 육체로 돌아간 엘리자베스의 삶은 정말 극한 상황에 몰려 있다. 물론 그 사태에는 자신의 욕심이 초래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긴 어렵지만, 거의 자아 분열까지 일어나 자신이 젊은 몸일 때 한 행동까지 타인이 한 행동처럼 미워하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감정선을 따라가보자. 자신은 그냥 자신이 되려 한다는 그 말에 어떤 희망이나 비전을 느낄 수 있을까? 솔직히 나라면 그렇게 극한 상황에서는 못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생각해본다면 모를까.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일 때 그냥 기분 좋게 나이브한 통찰을 좀 내뱉고 살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그게 누군가에게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이런 문제를 당위로 접근하면 정답은 없을 것이다. 전자처럼 살면 나중에 좀 부끄러울 일이 있다고 해도 사실 뭐 별 문제 있나 싶기도 하고, 후자처럼 살면 성숙하긴 해도 스스로 억압이 심하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시간이 지나면 이 장면을 또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지 궁금하다.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류의 말이, 기분 좋을 때나 쉽게 할 수 있는 얕은 통찰로'만' 느껴지지는 않길 바란다. 힘들 때도 유지할 수 있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난 헷갈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