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에 대한 개인적인 고찰
이 세상에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어. 그건 때때로 서로 비슷해지기도 하지만 놀라울 만큼 각자 다른 모양이 되기도 해. 그래서 세상의 기준들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명확하지가 못하고 모호해. 하지만 그 모호함이 사라지면 우린 서로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겠지. 필연적인 빈자리가 없다면 아마 널 사랑하지도 못할거야.
얼마 전에 누군가와 감정 표현에 대한 조롱을 즐기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가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냉소에 대한 대화로 이어진 적이 있다. 대화 상대는 나에게 냉소에 대한 어떤 글을 인스타그램 링크로 보내줬다. 읽어보니 좋은 글이었다. 대충 냉소는 감정을 솔직하게 직면하고 표현하는 것에 공포를 느껴서 만들어낸 겁쟁이 같은 방어기제라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글이었다. 통찰도, 근거도, 논리도, 메시지도 좋았다. 근데 사실 공감되는 동시에 좀 찔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그리 길지는 않은 삶을 돌아볼 때, 늘 냉소적이지도 않았고, 늘 냉소를 혐오하지도 않았다. 왔다 갔다 했으며, 그 사이에서 애매한 온도일 때도 많았다. 그리고 요즘은 그 애매한 온도에 있다. 너무 냉철하지 못하면 쉽게 상처받고, 너무 냉철해지면 좋은 감정들에 조차 무감해지고 삶의 활력이 사라진다. 이런 태도로도 저런 태도로도 살아보며 둘 다 체험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콘텐츠가 유튜브에만 한정해서도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누군가를 후회 없이 사랑하라는 콘텐츠도 있고, 관계에 집착하지 말고 상처주는 이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과감하게 멀리하고 고독을 즐기고 지향하라는 콘텐츠도 있다. 나는 전자에 공감해서 후자를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고, 그 이후에 후자에 더 공감하여 전자에 거부감을 느낀 적도 있다. 지금은 둘 다 이해가 된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이런 저런 과정 속에서 냉소에 대한 균형이 기계적 중립처럼 이루어졌던 적은 사실상 없던 것 같다. 내 스펙트럼은 어느 한쪽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알아보니 많이들 강조하는 중용이라는게 기계적 중립을 추구하는건 아니라 카더라. 때와 상황에 맞게 자신이 어떤 스펙트럼에 서있을지 섬세하게 조절하는 거라고 카더라. 그래서 중용에 대해 처음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굉장히 감명받았었다. 이보다 아름다운 지혜가 있을까? 싶었으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모호하고 난이도가 높을 줄을 모르고.
나에게 중용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상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상은 누구에 의해서도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중용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해서 ‘적당히’ 하라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어떤 기준에 절대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때와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라는 것부터 어설픈 어떤 가치관 주입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더군다나 그 때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또 ‘적당히’하라니, 말장난 같지만 그 말 자체가 수많은 고민과 딜레마를 가진 인간에게 얼마나 적절하고 적당한가. 하지만 아름다운 만큼 더 없이 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적절히’와 ‘적당히’라는 말이 더 없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다소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적절히’와 ‘적당히’는 아무 수치도, 정도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 실체는 ‘니 알아서 해’이다. 음식 레시피를 알려주면서도 정량을 말해주지 않고 ‘적당히’를 외치는 경우가 있다며, 듣고 따라하려는 사람은 난감하다고 하는 농담도 들은 적이 있다. 뻣뻣하게 어떤 태도만을 강요하는 것 보다야 장점이 굉장히 많은 것이 ‘적절히’, 적당히’이지만 그 기준은 실존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 한 명 한 명, 각자의 세계 안에서 저마다 다르게 측정되는 것이다. 그게 물론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공유되는 것들도 있지만, 우린 꽤나 많은 상황에서, 또 꽤나 많은 주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의 세계관이 참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적절하고 적당하다 판단된 기준이, 그 당사자에게 조차 시간이 지나면 와닿지 않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애초에 남에겐 설득력이 없는 기준이 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다.
또 재밌는 것이, 그래도 이성을 가지고 극단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감정을 회피한다기 보다는 욱해서 화낸다거나 판단 자체가 감정에 아예 휩쓸려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를 지향하는 것을 말함) 중용을 추구하는 이들도 겪는 고충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세상에서는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태도로 인해 인간미가 없다면서 피하는 경우도 있고, 도리어 그래서 매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게 삶이 더럽게 공평한 건지, 아니면 야속한 건지 참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애초에 누군가에겐 감정에 때때로 휩쓸리기도 하는게 인간미 있으면서도 ‘적당한’기준이었을지도 모르니 사람과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긴 시간 모호함을 미워했다. 미워하기도 했고 많이 두려웠다. 인간의 가장 큰 공포가 불확실성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혜를 쌓고 좀 안전해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는데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최근에 유튜브를 보다가 굉장히 와닿는 말이 있었는데 가치관에는 성격이 영향을 많이 미친다는 것이었다. 나름 마음 속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전문가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가치관이 다른 경우가 많았구나. 우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같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 같은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잘 살아보려고, 나름 중용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다수가 모인 사회에서도 늘 하하호호 좋은 소통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저마다 노력도 하고 상대를 이해해보려 하지만, 각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세계가 모인 하나의 세계에서 여러 기준들의 ‘적당선’이 어디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난 요즘 그게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 사실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하지만 모호함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와 개성을 앗아간다. 저마다의 다른 색이 모두 같은 색으로 통일되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세상이 아름다울까? 나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편리하니 추구해야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이다. 너는 무슨 색을 가졌고 무슨 색을 앞으로 가지고 싶은지, 내가 모르는 상대의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참 설레이는 동력이지 않은가.
그리고 중용을 추구하는 태도가 의미있는 것은 ‘어쨌든 그 노력이 극단과 같은 최악은 피하려는 시도여서’가 아닐까 싶다. 결국 저마다의 필터를 거친 출력 값은 각자 다를 지어도,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지 않을까. 우리가 그래도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고 가끔씩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서로의 노력이 있다고 느껴질 때, 무책임하지만 아름다운 ‘적절히’, ‘적당히’를 추구하느라 애쓴 흔적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아닐까. 이전보다 현실주의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허무주의에 다시 빠지기는 싫어서 몸부림치는 한 사람이 냉소, 중용, 다양성에 대해 든 생각을, 한 시기의 흔적으로 남기 듯이 이곳에 또 남겨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엔 조금이라도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참고로 에세이 처음에 나오는 문장은 어디서 따온 인용문은 아니고, 그냥 소설 대사 같은 것으로 나오면 예쁘지 않을까해서 써봤습니다. 이번에 쓴 에세이 전반을 관통하고 요약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에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