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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나름 애썼으면 된거야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어쩐지 무서웠던 나에게

by 새벽녘

나는 어렸을 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너무 좋았다. 이보다 멋진 말이 있을까? 자기가 할수있는 최대한을 해본다니. 거기에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까지 따라붙으면 더 할 나위 없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니. 떳떳하고 멋지게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는구나 다짐했었다.


근데 어릴 적의 환상이라는건 깨지라고 있는건가 보다.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현장들을 성장 과정에서 보다보면 현실은 다른건가 혼란이 온다. 누군가에 대해 짧은 기간에 업신여겼다 찬양했다 또 업신여겼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여론들을 보다보면 불편하고 씁쓸한 마음들이 누적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있다고 한들 결과가 여러 변수로 어그러지면 가차없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건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가치가 이성 속에서 흐려지지는 않을지라도, 타인의 평가에 초연하기에 어린 날들의 마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아름답기도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말에 의지해 살려해봐도 그 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나를 짓눌렀다. 얼마전엔 그걸 내 언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가정하는 최선에는 끝이 없었다.


'더 잘할 수는 없었나?'

'다른 방법은 없었나?'

'더 노력할 여지는 없었나?'


적어도 나에게 '최선'이라는 단어는 이리도 무거웠었다. 내가 한 노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도, 내 게으름이나 노는 시간 등에 대해 자비를 베풀기도 어려웠다. 나에게 최선이라는 단어는 늘 여지를 만들어냈다. 조금 더 했더라면, 그때 우울해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등등...


어느 시점에는 의문까지 추가되었다. 인간의 삶에는 운이 개입하며,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동물이며, 무기력을 느끼기도 좌절하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순간들이 인생사 새옹지마처럼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이쯤되니 나에게 최선이라는 말은 어찌 다루어야할지 모르는 가치가 되어버렸다.


'근데 매순간 최선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면 숨을 쉬고 살 수 있을까? 애초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근데 그러고 사는게 좋은걸까?'


좋은 결과를 내라는 것보다 최선을 다하라는게 훨씬 어려운 영역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이런 의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결과를 내는건 가능할수 있는 목표지만, 최선을 다하라는건 나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젠 최선이라는 말은 내가 노력을 하게 만드는 가슴 뛰는 말이 아닌, 어차피 도달할 수 없는 피곤하고 무기력한 말이 되어있었다.


그냥 적어도 나에겐 이 단어가 안맞았던 것 같다. 활기도, 자부심도, 여유도, 즐거움도 이 단어 앞에 청소기에 먼지가 빨려들어가듯이 빨려들어가서 사라졌으니까.


'그냥 내가 나름 애써봤으면 된거다. 괜찮다'


이 말이 활기도, 자부심도, 여유도, 즐거움도 찾아주었다. 최선까지는 모르겠는데 내 딴에 애써봤으면 된거라고. 피드백은 하면 되는거고, 내 문제가 아니면 그냥 그건 냅두라고. 사람이 어떻게 매번 가능한 최고의 경우의 수로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살 수 있을까. 나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더 잘할 수 없었냐고 꼬투리잡으면 언제든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이 문장이 안맞을수도 있다. 어줍짢은 힐링 메시지같은걸로 받아들여질수도 있겠지. 사람마다 같은 언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니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그저 아름다울 최선이라는 단어를, 나는 그렇게 그렇게까지 내심 쥐어짜내서 괴로운 단어로 봤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 문장을 생각해내고 나는 숨통이 좀 트였다. 그냥 내가 내 딴에 애써보면 된거라고. 너무 후회하지 말고 다음 챕터를 보고 가도 괜찮다고. 부끄러움을 가지는걸 너무 습관이나 의무처럼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뭘하든 더 애써보고 열심히 해 볼 맛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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