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리뷰를 가장한 에세이 성격의 글이라서, 영화에 대한 언급은 생각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자신의 모자람인가, 불공평인가. 시간 길게 두고 생각해볼만 하지만 그걸 허락해주지 않네
- E SENS <비행> 가사 中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쓰고 있는 리뷰는 아니다. 거의 2주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리뷰를 쓰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나름 재밌게 감상했음에도 쉽사리 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선명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만의 해석이 확고하게 바로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모호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일 수도 있다.
나의 글을 그래도 그 동안 읽어왔던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취미로 심리학, 정신의학, 철학, 자기계발과 관련된 책이나 영상들을 보며 공부하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렇지만 자기계발에 대한 흥미는 좀 식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쨌든 이 분야들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다소 민감한 정치와 관련된 사고들 과도 이 분야들은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었다. 그건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다소 예쁘게 정리된 이론이나 본질 같은 것들이었다면, 실제 세상은 정리되지 않은 날 것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론과 탐구는 그 날 것의 거친 현실을 반영하고 관찰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심리학이든 철학이든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들이든, 한 개인의 삶의 성패에서 개인의 책임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이에 대해 개인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사회의 불합리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억울해하고 따지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들이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한 권의 책에서, 한 사람, 한 전문가, 한 권위자의 말에서 나온 말들에 감동받아 내 삶의 태도로 삼으려했던 것들은, 날 것 그 자체인 현실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언제나 의문을 만들어냈다. 남 탓을 하면 안되고, 환경 탓을 하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생각보다 마냥 매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들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기 인생의 여러 변수와 결과들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라고 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남 탓을 하지 않고 극복해나가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며 용기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남 탓과 환경 탓은 달콤한 유혹 같은 것이어서 빠지기 시작하면, 노력하고 책임지려 하지는 않으면서 쉬운 길만 선택하지만 행복해지지는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나는 이들에게 먼저 빠져들었던 것 같다. 이들로부터 내가 성숙한 태도로 잘하기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얻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날 것의 현실에 이를 적용하기 시작하니 서서히 의문스러웠다. 세상에는 내가 예상한 범위 밖의 부당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성숙한 태도로 극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여러 미성숙한 언행이나 태도를 일삼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맞다. 근데 그러면 감정은? 공감이나 위로는? 자신에게 책임을 물라는 가치관은 감정, 공감, 위로 같은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앗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파할 시간에 일어나서 달리는 편이 낫지 않나’, ‘남 탓, 환경 탓은 미성숙한 것 아닌가? 자신에게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게 훨씬 성숙하지 않나?’라는 잣대로 타인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공감하고 위로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그 기준을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당연히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저런 기준을 타인에게 입밖으로 꺼내어 전달한 적도 없으며, 이전처럼 공감하고 위로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이전처럼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 깊이도 자연스러움도 훨씬 미흡했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관대하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정말 알 것 같았다.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의 삶을, 그 태도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자리잡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가치관을 너무 강하게 가지게 된다면, 그 가치관이 타인에게 전혀 개입되지 않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떤 고집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에.
사실 그리고 그 가치관과 기준이라는 것이 내심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 내로남불의 행태들을 깨달은 것이 가치관을 전처럼 강하게 추구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도가 너무 높은 기준들은 보통 자기가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정작 나한테는 제대로 들이대지 못할 기준들을 내심 남을 보면서는 들이댔을지도 모른다. 나한테서도,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언행에서도 이런 내로남불 행태가 자각된 시점부터는 더 이상 이런 ‘성숙한 태도’에 환상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실현가능성과 그 비겁함에 대해 강한 의문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받아들일 부분도 있기에 여전히 참고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전처럼 강직하게 생각할 수는 없고, 나는 그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대 결의 길이라고 의문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라, 자신의 감정적으로 서툴고 미흡한 부분이 어디서 왔는지를 잘 탐구하라는 메시지들에 이후에는 빠졌었다. 처음에는 가려운 곳이 긁어지는 느낌이면서 자유로운 느낌, 해방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거치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었다. 그럭저럭 잊고 살던 일들이나 감정들을 다시 꺼내서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러다 보니 타인과 환경을 굉장히 원망하게 되었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줬어. 왜 이런 더러운 것들, 고통스러운 것들을 줬어.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면 훨씬 나은 경험들을 했을까, 훨씬 나은 선택들을 했을까, 훨씬 좋은 감정들을 느끼며 삶을 살았을까, 혹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후회의 늪에 빠져서, 그보다 더 깊은 원망에 늪에 빠져서 자주 허우적거렸다.
오해할까봐 언급하자면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뿌리를 탐구하라는 메시지들이 이런 식으로 원망과 후회의 늪에 빠지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전문가 수준의 메시지들에서는 그런 식으로 풀지 않는다. 솔직하고 깊게 탐구하되 이후 방향은 훨씬 건강하고 성숙한 방향으로 풀어나가는 편을 권고한다. 하지만 그들만 이런 메시지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제를 빌려와서 후회와 원망의 늪에 빠지는 방향으로 말들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걸 구별하고 현명하게 다루어 나가기에는 나는 어렸고 혼란스러웠고 미숙했다. 그래서 많이 원망도 했다.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빠졌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꽤 깊게 빠졌던 것 같다. 여기에 개인이 얼마나 환경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혹은 타인과 환경, 시스템, 세상에게 바로잡을 것들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까지 듣게 되면 이게 더 심화되기도 한다. 당연히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 다루면 사람의 활력과 자율성을 잡아먹기도 하지 않나, 그런 경험의 시간들도 가졌었다.
그래서 개인의 탓과 환경의 탓은 어느정도일까. 그리고 문제 해결에 있어 각자 어느정도의 책임을 느끼고 어느정도의 노력을 해야할까. 사안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고, 애초에 사람마다 생각이 상이하게 다를 문제이다. 근데 이 문제는 예민하다. 음식 취향에 대한 대화처럼 ‘넌 그래? 나는 이래’ 식으로 쉽게 존중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주제이다.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핵심적인 가치관을 관통하는 주제이기에, 생각이 강할수록 쉽게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성향에 따라서, 살아온 삶에 따라서, 만나온 사람들, 접해온 정보들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토론들은 세상을 발전시키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도 했고, 언어적 물리적 폭력의 끝에 피비린내나는 상처들을 만들기도 했다.
서론이 길었다. 이 영화는 정리해고에 대처하는 개인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리해고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한 개인이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어떤 고난이나 불행으로 생각해도 되겠다. 만수(이병헌 역), 범모(이성민 역), 시조(차승원 역)는 모두 이전에 제지회사에서 근무했었지만, 해고당해서 실직자 상태가 되거나(만수, 범모), 다른 일을 하게 된다(시조). 이들은 공통적으로 제지회사에 일하는 것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오랜 기간 프라이드를 가지고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불합리하게 해고된 이들은 자연재해같은 불행을 겪게된 것이다. 이 좌절 속에서 셋은 다소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시조는 가장 현실에 빠르게 타협하고 적응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신발가게에서 바로 일을 구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여전히 제지회사, 즉 이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있지만 자신이 상황이 경제활동을 쉬지 않고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익숙하지 않은 업종에 취업해서 곧바로 현실을 쫓는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아마 사회구성원 다수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사람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상을 그만큼 억압하고 살아간다. 난 이게 사실 마음 아픈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발빠르고 성실하게 대응한 만큼 현실의 문제에 덜 허덕여도 되고, 주변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건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이 얻게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억누르고 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주 그런 사람들을 ‘성숙하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착한사람이라는 평가가 당사자 입장에서 기분좋은 평가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어느 시점부터 자주 나오는 것도 놀랍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래도 성실하고 이타적인 이런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현실을 떠나서 그냥 바램이다. 특히 이미 이상은 일단 어느정도 억누르고 살기로 결심했거나, 그 선택을 한 지 좀 오래된 사람들이라면 그 축복의 메시지를 더 강하게 전달해주고 싶다. 당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이다. 새롭게 적응한 삶 또한 그의 주체적인 선택이었기를, 그 길에 예상하지 못한 새 행복들이 있어 그 길 또한 새로운 이상이 되었기를, 여유가 생기면 자기가 원하는 이상들을 다시 추구해보고 살 수 있기를.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 시조는 너무 허무하고 부당하게 죽어버렸지만 말이다…)
범모는 시조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이다. 제지회사에서 나름 굉장히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현재는 이상의 좌절로 굉장히 무기력한 인물로 나온다. 이런 경우도 현실에서 많은 것 같다. 상황이 잘 갖추어지면 굉장히 능력있고 성실하지만, 좌절 앞에서 굉장히 무력하고 우울해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남 일이 아니고 나의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데 그런 상황이 사람이 있다면 그 무기력과 우울의 경험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그리고 범모에 대해서 더 재미있는 부분은 굉장한 무기력을 겪으면서도 ‘제지회사’가 아닌 다른 일은 전혀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시조와 굉장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는 꽤나 이상주의자처럼 보인다. 그 부분에 있어 고집도 꽤 강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시조 같은 인물이 겪는 고충이 있다면, 범모처럼 이상을 쫓는 이들이 꼭 주체적이고 행복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이상을 추구하느라 제지회사에 뽑힐 때까지 버티고 있는 그의 모습이 활력있고 행복해 보이는가? 자기 효능감이나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가? 아내 아라의 다른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회유를 들을 때 기분이 좋아 보이는가? 결국 바람난 아내의 모습을 보고 그가 고통에서 초연한 것처럼 보이는가? 전혀 아니다. 고집이 강한 이상주의자는 사랑과 인정대신 한심하다는 시선과 냉대를 견뎌야 될 때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 이상추구가 꼭 잘풀리지는 않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그리고 이들은 가진 것이 적어지고 불안해질 가능성이 많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이상이 뭔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헷갈려하게 된다. 자신의이상과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범모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불안하고 무력해보인다.
사실 범모와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싶은 부분은 아내 아라가 범모에게 했던 대사이다. 자기가 원해서 실직된 건 아니지 않냐는 범모의 말에 아라는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태도가 문제다’라는 말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고난과 좌절은 불합리하고 예상못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살면서 몇 번씩 이런 상황을 겪는다. 겪을 수밖에 없다면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많은 책들에서 이런 메시지를 다루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다소 자기계발적인 메시지를 호통치며 관객들에게 주입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런 메시지에 마냥 ‘그치! 그게 정답이지’라고 생각하고 통쾌하게 보게하지는 못하게 하는, 굉장히 찝찝한 영화이다.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했으면 그런 메시지를 듣고 정신 차린 사람이 잘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실직에 대해서 ‘시조처럼 이상도 적절히 포기하고 저자세로 현실을 성실하게 쫓으면서 사는’그런 성숙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해피엔딩에 이르는 내용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한 묘사, 대사도 나온다. 불합리한 해고라는 구조적 문제가 얼마나 문제인지에 대한 조명을 거두지도 않는 듯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이들이 자신이 다니던 제지회사에 복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과연 그렇게 불합리한 이상과 욕심인 것인지’, 또한 ‘이에 대한 해결을 각 개인이 하는 것이 맞는지, 이런 문제에 불합리하게 처하게 만들고 방치하는 사회와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지’에 대한 물음도 던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인의 대처에 대한 책임도 묻고, 사회의 대처에 대한 책임도 같이 묻는, 그런 모호함을 다루는 영화가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모호하기에 더 현실과 닮아있지 않나 싶은 영화였다. (만수에 대해서는, 시조나 범모에 비해 다소 극단적인 방향의 선택을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현재 나의 리뷰 흐름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따로 다루지 않겠다.)
결국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해석될 영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을 쫓으며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시조처럼 일을 현재 하고 있지 않고, 범모나 만수 같은 상태라면 더욱 그런 것 같다). 현실에 적응하고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불만만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좋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냐는 이야기도 자주 하는 것 같다. 무엇이라도 눈 앞에 있는 일이 하기 싫든 하기 좋든, 어쨌든 열심히 하면서 남 탓, 환경 탓, 사회 탓을 하지 않는 것을 성숙한 태도로 보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는데 외부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꺼리는 것은 굉장히 미숙한 태도라는 것이다.(그냥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경향성이 있는 것 같았다)
반면 구조의 불합리함이나 권력자,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벌어지는 문제를 개인의 태도나 노력의 문제로 돌리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작 더 큰 문제인 부분, 더 큰 책임을 져야하는 부분은 따로 있는데, 이에 대해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손쉽게 책임을 묻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나 구조에 대한 요구, 비판을 남 탓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살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문제들에 비겁하게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이 또한 그냥 내가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경향성 분석일 뿐이다)
전에 잠깐 웨이브 라는 OTT에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초반부만 보고 후반부는 보지 못하고 OTT를 해지하게 되어서 다 보지는 못했다(기회가 되면 다시 결재해서 끝까지 보고 싶다). 그런데 초반부만 본 것이지만 느낀 것이, 정말 사람들이 다양한 경향성과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룬 주제(개인과 사회의 책임은 각각 어느정도이며 각각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생각들도 사람들이 정말 저마다 달랐다. 선천적인 성격, 기질의 영향도 크다고 보고,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살아온 삶과 환경, 또 개인의 경험들의 영향도 꽤 큰 것 같았다. 저마다 다르게 태어나서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우리들이라서, 세상에 아무리 ‘보편성’이나 ‘상식’같은 범주가 있다고 해도, 이런 예민하고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 대체로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더군다나 이런 부분은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이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감정적인 문제, 호불호의 문제이기도 하니까(내가 느낀 세상과 사람들은 그랬다. 나또한 마찬가지고). 이런 프로그램들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여러 책을 읽어보고, 때로는 인터넷의 글, 댓글들을 읽어보면서 어렸을 때 이런 문제들에 있어 꽤나 나름의 주관이 강했던 나는, 도리어 그 경계가 옅어지고 헷갈림을 많이 경험했다. 현명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지만, 고집이 약해졌던 경험이 훗날 더 현명하고 단단한 주관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그럼 돌아와서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모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시조처럼 현실적인 해결책을 생각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다고, 영화를 보면서 직관적으로 느꼈다. 현실은 너무 비합리적이고 우연과 운이 난무하기에, 이상만을 쫓아서는, 그냥 내가 행복하기 너무 어려울 것 같다. 원래 현실주의자보다 이상주의자에 훨씬 가까웠고, 지금도 나는 현실만 쫓아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좀 타협하고 사는게 더 행복한 성향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자신의 이상을 최대한 쫓는 것이 행복인 사람이라면 또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그 선택이 남의 행복과 불행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훨씬 복잡한 토론 거리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선에서는 나는 개인의 성향에 따른 가치관과 판단을 존중해주고는 싶다. 나와 다를지라도. 존중보다 대립과 갈등이 문제해결이나 발전에 있어 더 필요한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나는 요즘 분위기보다는 각자의 가치관에 대한 존중이 좀 더 이루어지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물론 그러기 어려운 주제들이라고 할지라도, 가볍게 대화할 때라도 좀 더 숨통이 트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어차피 각자의 선택으로 감당해야 할 각자의 현실은 말싸움과 논리보다 훨씬 예상 불가능하고 거칠지 않은가. 때론 원하지 않는 현실의 결과에서 허우적대게 되는 것이 삶이지만, 그래도 각자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에 대한 존중은 조금이라도 지키고 살 수 있길 축복해주고 싶다. 이 영화의 만수처럼 너무 극단적인 선택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