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by 새벽녘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최은영 작가의 <아치디에서> 대사 中

이따금씩 생각이 나는 대사다. 이 대사가 나온 <아치디에서>라는 단편이 워낙 좋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대사는 처음 접했을 때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이 대사를 들은 작중 인물 하민과 나는 지금 상황이 같지도 성격이 같지도 않지만, 어쩐지 나도 꼭 이 대사가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착하다는 말이 사실 점점 힘을 잃는 것 같다. 그 가치 자체가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점점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사회분위기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객관적인 판단은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요즘 착하다는 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타심은 무엇이고, 이타심의 동기는 어떤 것이고, 또 어떤 방향의 가치관이 선한 것이고, 그 근거는 무엇이고… 요즘처럼 점점 더 가치관이 파편화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생각을 강화하는 시대라면 그 기준은 점점 모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다. 누군가에겐 타인의 기분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착함의 덕목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착함의 덕목일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집단에서 착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해봐도, 세상은 넓기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혹은 다른 어떤 집단에서는 그 사람이 굉장히 잘못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계속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의 가치관들을 듣다 보면 그런 힘 빠지는 생각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그게 무섭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하민의 동생이 하민에게 말한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은 어떤 말일까. 하민이 책임감에 짓눌린 인물이니, 그 책임감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도 뭔지 떠올리지 못하는 인물이니, 책임감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도 해보고, 자유롭게 그것들을 좀 추구하며 살아도 된다는 의미겠지.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이 참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기준은, 내 가치관은 필시 누군가에게 비난받기 마련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노력만 하면 생각이 달라도 서로를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낙천적으로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순간이 지구 어딘가에서는 임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수많은 곳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을 가지고 대립하기 마련 아닐까. 적어도 내가 봐 온 세상은 그런 모양이었으니까.


그래서 착하다는 기준에 맞춰 살려고 하는 것은 때때로 억울해지는 것 같다. 책임감이든, 이타심이든, 그게 완전히 내가 원해서 주체적으로 택한 것이면 몰라도, 사실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누군가의 착하다는 기준에, 어떤 집단의 착하다는 기준에 맞춰 살려면 나를 숨겨야 한다. 차마 말하지 못한 내 욕구를, 성향을, 기준이나 가치관을. 사실 그건 바보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누군가와 원만히 지낼 수 있게 해주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타인의 기분을 생각해 줄줄 아는,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생할 줄 아는 고귀한 마음일 수도 있다. 근데 문제는 역시 정도가 지나치게 될 때가 아닐까. 그 지나치다는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고, 즐겁지 않다면 한 번 되돌아봐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자아가 약한 사람이라면, 혹은 긴 시간을 자아가 약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 대사에 많이들 공감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누군가의 기준에 ‘괜찮은 사람’, 혹은 ‘착한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봐도, 그 노력이 생각보다 끝이 없으면서 허무하게 느껴질 때. 나의 그 노력이 다른 기준을 가진 누군가에겐 쉽게 혐오나 조롱의 대상이 될 때. 그런데 그걸 직시한 순간에 그렇다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붙잡고 지켜온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는 남에게 자신의 기준을 요구하기만 하지, 타인에게는 좀처럼 맞추려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씁쓸한 사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한테 필요한 말이 바로 ‘자유롭게 살아’가 아닐까. 니 기준을 가지고 살아도 돼. 너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돼. 자유롭게 날고 싶으면 날았다가 쉬고 싶으면 언제든 날개를 접고 쉬어도 돼. 물론 이것도 극단적으로 가면 책임감 없고 스스로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이미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수 없이 먼저 살피고 노력해보고, 남의 감정과 기준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걱정은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 난 그런 사람들한테는 좀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그냥 말해주고 싶다.


‘착하게 살지말고 자유롭게 살아’가 때론 나한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고 한다면,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라는 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이렇게 남을 먼저 살피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냥 당신 같은 사람은 좀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고, 남들 앞에서 좀 울어도, 때로는 하소연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처럼 이타적으로 살려고도, 자기검열을 하려고도 잘 안하는 것 같은데, 당신 같은 사람이 좀 울어서 미안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타심이나 책임감은 폄하되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걸 실천함에 있어서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요즘엔 와닿는다. 하민에게 동생이 이런 말을 해준 것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했던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조금 마음을 쉬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때때로는 나도 이 대사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줄 것도 같다. 이런 마음이 자기 연민일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자기연민이라면 그건 나름대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래서 누구 탓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