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한 사람에 대해 가졌던 동경
갑자기 전에 정우열 박사님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다시 그 영상을 찾아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지식화도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심리학에 관한 지식들을 습득할수록 스스로가 설명이 되고 앞으로 해결책을 알았다는 느낌에 안심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 머리(생각)로만 해결하려 하면 오히려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결국 자기 감정을 실제로 솔직하게 마주하고 현실을 잘 지내는 것이 핵심이고 더 중요하다(요약이라 다 포함 못한 내용이 있다.)’ 사실 내가 어느덧 이런 패턴에 갇혀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최근에 그냥 부딪히고 내 것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영상에서는 감정일기를 쓰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 쓰는 글들이 감정일기와는 다르지만 내 복잡한 머릿속과 감정을 비워내는 글들이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힘들다고 느껴지거나 머릿속이 과부화가 오면 에세이를 쓰든 영화리뷰를 쓰든 해서 내 머릿속을 그리고 마음속을 좀 비워내면 확실히 좀 가벼워지고 스스로 치유되는 느낌도 받는다. 이렇게만 끝나면 아름다울텐데, 진짜 끝까지 솔직해지면 그렇다.
‘글쓰는걸로 스스로 치유하는 것만이 목적이면 여기에 왜 올려? 비슷한 생각이나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 공감도 하고 같이 치유되라고? 진짜 그런 아름다운 이유만 있어?’
그냥 있어보이고 멋있어보이고 싶으면 그 두 이유만 대고 스스로의 성숙함을 느끼면서 만족할 것이다. 근데 그게 현 시점의 나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다.
진짜 내 솔직한 대답은 이런 것 같다.
‘스스로 치유되는 것이 원래 글쓰기의 출발이었고, 비슷한 사람들이 같이 치유되거나 통쾌해하는 것도 좋은 것도 맞아. 근데 왜 여기에 연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계속 여기에 글을 쓰게 되는데? 솔직히 누가 읽어줄 때, 그리고 반응해 줄 때 좋잖아. 그게 솔직한 동력 중 하나잖아. 같이 치유되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니가 공감과 인정을 바라는 면이 있잖아’
감정과 욕구에는 인정하거나 드러내기 민망한 것들이 많다. 감정에는 사소한 것에 타격받는 마음, 별것도 아닌거에 삐치는 마음, 대인배 답지 못하게 초조해지는 마음. 욕구에는 물욕, 성욕, 인정욕 같은 것들. 감정에 솔직해지라는 건 욕구에 솔직해지라는 것과도 연결될 것이다. 그러니 칼 융이 그림자이론 같은 것도 만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감정과 욕구는 분리해서 설명하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연결된 것들이니까.
왜 물욕, 성욕, 인정욕 같은 것은 민망할까. 그냥 괜히 좀 초연해져야 성숙하고 멋있는 느낌도 직관적으로 받는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이런 인식이 다르고, 특히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걸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더 성숙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도 점점 퍼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느끼기엔 이런 부분에 초연한 것을 더 좋게 생각하지 않나 느낀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저런 욕구가 민망하게 여겨지거나 좀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도 맥락은 당연히 있다. 저게 지나쳐지면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다. 인정욕은 지나쳐지면, 그리고 다른 욕구와 가치에 비해 저게 너무 압도적으로 커지면, 나르시시스트 같은 인간이 되고 만다. 그건 자신을 헤치고 타인도 헤친다. 그래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좀 경계하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이런 욕구들은 커지면 특히나 치명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기에. 근데 그게 저 욕구들을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해 부족하지만 계속 공부하다보니 최근에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적절히 다루면 그렇게 문제되는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인정하고 적당한 정도로 다루면 좋은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다. 근데 그 적당히의 기준이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게 중용이 어려운 이유인데, 다행히 답이 없어 우리들은 개성과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사실 나는 항상 그 ‘적당히’가 좀 어려웠다. 나는 확실한 기준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편한데. 지금이야 답이 없어서 개성과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난 그게 짜증났던 적이 너무나 많았다. 좋은 가치관, 좋은 욕구, 좋은 방어기제면 시험지 100점을 목표로 공부하듯이 꽉꽉 채우고 싶고, 나쁜 가치관, 나쁜 욕구, 나쁜 방어기제면 집에서 쥐나 해충을 쫓아내듯이 내 안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싶은데. ‘그게 효율적이고 좋은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돌이켜보면 내 마음 속에 있었다(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내심 저런 욕구들을 민망하고 부끄럽게 느끼는 편이었다. 스스로 저런 욕구들보다 다른 멋있는 대의적인 명분이 훨씬 큰 사람이기를 바랬다. 그러니 칼 융의 그림자이론 같은 것도 배우면 뭐하나. 나는 언제나 멋있는 명분이 더 크기를 스스로에게 바랬고, 그러기 위해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애썼다. 좋은 명분을 찾으려 하고, 나는 이 가치를 쫓는 것이지, 유치하고 위험한 인정욕구 같은 욕구를 쫓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이전과 달리 성숙한 사람이니 그러지 않는다고. 근데 문제는 자꾸 스스로 설명이 길어진다. 생각이 많아진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이제는 현실에서 밀려오는 감정과 욕구를 민망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직면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아이러니하게 그게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 같다. 솔직한 마음들을 인정하고 직면하지 못해서 머릿속에서 합리화하고 많은 생각을 하느라 에너지를 쓰는 것도 이제는 좀 완화하고 싶어서 말이다. 반면 좀 더 솔직해지면 많은 것들이 이전보다 심플해질 것 같다. 내 감정과 욕구가 지나쳐지지 않게 살피고 노력하면 되지, 타인의 감정과 욕구도 살피고 존중해주려 하면 되지, 저게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다른 중요한 가치들도 떠올리고 분별할 줄 알면 되지, 나한테 버젓이 있는 걸 모른 척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싶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늘 내 나이가 되게 많게 느껴지는데, 이제야 이런 과정을 겪는 것 같아 좀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래도 내 솔직한 마음을 연료 삼아서, 좋은 방향으로 해소할 수 있는 어른에 한 걸음 다가가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 그리고 지식화 방어기제도 좀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