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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 공포증, 자기확신 공포증

아직 무서워도 다음 단계로

by 새벽녘

난 진실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래서 스스로 핑계대거나 합리화하는 느낌이 들면 두려웠다. 내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편한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그렇게 엉망인 사람이, 내가 싫어했던 그들처럼 되는 것은 아닐지 무서웠다. 자기합리화가 꼭 진실이랑 척을 지는 것인지, 내가 진짜 진실을 잘 찾아내고 분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나는 어쩌면 그저 공포심이라면 감정에 휘둘렸다. 스스로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약한 사람이, 비겁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회복탄력성은 저 한구석에서 나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최근에 내가 불행했다 느꼈던 일들, 고통스럽다 느꼈던 일들, 기분 나빴다고 느꼈던 일들. 상당수가 그 경험들 덕분에 한 사고들이, 고찰들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줬다. 생각해보면 올해와 작년 힘들었던 순간들은 대부분 그렇게 내 행복과 성장의 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이상한 괴리감이 들었다.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합리화같았기 때문이다.


안다. 고통의 경험이 늘 행복의 거름이 되줄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일에 법칙을 세우려하면 이 야속한 세상은 너무 복잡해서 그 규칙성을 깨뜨리는 예외를 잘도 내놓는다. 하지만 적당한 범위의 이런 사고는, 어쩌면 이런 자기합리화는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그리고 앞으로 겪을 고통 속에서도, 후회의 빛을 띠고 있는 내 과거의 고통 속에서도 나의 행복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고찰을 더 잘 발견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알고있지만>이라는 드라마가 있다.거기서 주인공 유나비의 이름을 무슨 뜻으로 지었는지 나비의 이모가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인생의 좋은 일 나쁜 일 다 자양분삼아서 나아가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딘가 든든해지는 말이다. 좋은 일, 나쁜 일 다 내가 골라서 경험할수가 없는데, 다 내가 자양분삼을 수 있다면 적어도 최악은 없는 것 같으니까. 누가 보기에 합리화같더라도, 나는 조금 이 말에 기대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많은 문제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던가. 아Q정전 마냥 지나치지 않으면, 이런 방향의 합리화는 사실 내 회복탄력성을 돕는 성숙한 사고 방식일지도 모른다. 유퀴즈를 보다가 장원영이 '보상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말을 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고통없는 보상은 없다'라는 격언을 역발상해낸 것이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보상이 결국은 있으니까 버텨볼만 하다는 것. 근데 그 보상은 스스로 찾아내야하는 면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근데 이전의 나처럼 합리화를 너무 감정적으로 공포스러워하면, 그런 성숙한 태도를 가질 기회조차 잃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내가 굉장히 스스로 가지기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이 자기 확신이다. 내가 보기에 큰 문제는 자신을 의심하는 자가 저지르지 않았다. 보통 자기 자신의 의견, 생각, 능력을 너무 과신해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자기 말이 다 맞다는 사람과 독선적인 사람이 어려서부터 무척 싫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내심 자기 의심만을 선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에 대해 알아보고, 심리상담과 정신의학, 철학에 대해 알아보며 자기확신이 경우에 따라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머리로 이해해봐도 나는 이미 극도로 커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관성처럼 타인의 말을 찾아 헤맸다.


그 결과 나는 타인의 말들을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에 서툴렀다. 결국 중심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조언들을 봐도 나는 난감했다. 그래도 되는건가? 그러면 위험해지는거 아니야? 정도의 문제임을 알지만 그 자기확신이라는걸 언제 스탑해야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확신이라는게 취하면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모르게 되는건 아닐까?특히 요즘 세상은 확증편향에 빠지기 쉬운 세상인데 확신을 가져본다는건 리스크가 지나치게 큰 것 아닐까?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기는 힘들었다. 점점 더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문제를 다루고 처리하고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내가 내 행복을 위한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내 기준이라는게 필요하다는걸 인정하게 되었다. 계속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살아서는, 이 방향이 맞는지 저 방향이 맞는지 살펴보기만 해서는 내 것을 계속해서 만들기 어려웠다.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보편성의 가치가 있다해도, 보편성과 집단지성 역시 때때로 실수하며 우리를 배신한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다만 각자의 기준이 있다. 정답이 없다고 기준을 가지지 못한다면, 글쎄 나는 그게 사실 너무 힘들었다. 나는 복잡하고 정답없는 세상에서 기준을 가질 용기를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는 말을 통해서 한 번 가져볼까 한다. 내 주관과 기준은 있지만, 그게 결국 세상의 정답은 아님을 한번씩 계속 기억하려하면 되지 않을까. 다른 세계의 생각들도 들어보면서. 그래도 계속 배우려고 하면서. 아직 좀 불안하고 무서워도 그렇게 다음 스텝으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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