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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해받고 싶지만, 넌 비난하고 싶어

두서없는 복잡한 생각들

by 새벽녘

타인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내 생각보다 별로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나를 당황스럽게 하며 괴롭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노력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오히려 비어 있기에 어떤 인간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을 주는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수준으로 기대치를 낮추려는 노력은 나를 상당 부분 편안하게 해줬다.


관대함이라는 것은 자기혐오를 가진 이에게 있어서는 안식처 같은 것이 되어줬다. 삭막한 마음안에 숨 쉴 공간이 생겼다. 나는 앞서 첫 문장으로 타인을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본다고 했다. 내가 긴 시간 그래온 이유는 시시 때때로 타인에게 엄격해지는 나 자신을 볼 때 스스로 자격이 있는지 검열하기 위함이었다. 그 기준 아래에서 억지로 타인에게 관대해지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내가 충분히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해봤지만, 둘 다 소모적인 방식이었다. 나도, 남도,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내 기대만큼 아름다울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어쨌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내 내면의 많은 부분을 바꿔주었다.


하지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이제는 내가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같은 것은 진작에 내려놨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흔들리기에 계속 변화하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흔들림들은 매 실전의 순간에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더 나아졌다는 어떤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이런 흔들림들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감까지 느끼게 한다.


나는 말했듯이 나 자신과 타인에게 있어 이전보다 관용적으로 변했다. 이전 같으면 무조건 안좋은 것이라고 했을 특성들을 볼 때, 그런 면이 있기에 가질 수 있는 개성, 아름다움, 장점들이 있음을 습관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근데 그럼에도 나는 너무나 자주 내 그릇의 한계를 느낀다.


그 그릇의 한계를 크게 체감하는 핵심 키워드는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은 이제 한국에서 누구든 아는 표현이 되었고, 누구나 즐겨쓰는 표현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이 내로남불이라는 벽 앞에서 자주 막히곤 한다. 관용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걸 허용할 수는 없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저마다 다른 것인데, 이 이야기는 조금 미뤄두겠다. 아닌 건 아닌거고,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감정에 솔직하고 이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기에는 마음 한 구석에서 양심 비슷한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라고 뭐 그리 타인에게 잣대를 들이밀고 평가할 만한 자격이 있나. 그거야 말로 내로남불이 아닌가. 근데 내로남불이야 말로 인간 본성의 핵심이니, 스스로에게도 이런 부분에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왜 이토록 너도 나도 즐겨쓰는 말이 되었겠는가. 그냥 인간 자체를 설명해주는 말이기에, 그 예시는 찾아보려고 하면 TV를 틀어서도, 유튜브를 틀어서도, 주변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정말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로남불에 마냥 관대해지기에는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은 문제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이 그런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하지도, 인식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지하고 부끄러워하고 덜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둘이 어떻게 같겠는가, 나아지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 무섭지 않냐고 스스로 물어보면 언제나 그렇다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결국 이것도 또 정도의 문제인가. 하지만 이 정도의 추악한 본성 앞에서 어느정도 허용해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뭔가 씁쓸하게 느껴져 기운 빠질 때도 있다. 그리고 나의 내로남불은 조금 더 허용해주고 남의 내로남불은 좀 덜 허용해주는 것 까지가 완벽한 인간 내로남불 본성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좀 시니컬한 날에는 진짜 인간사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며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아닐까 싶은 순간도 있다. 사실 애초에 내 머릿 속에는 계속 돌고 돌고 있는 것이다. 아닌 건 아니라는 기준, 그리고 관용 사이에서.


새삼 이런 주제에 대해 한 번씩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계속해서 많은 타인의 이야기들을 듣기 때문이다. 현실에서건, 미디어에서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거의 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 같은데, 그런 사람들조차 저마다의 편향이 꽤 있구나 하고 느낀다. 좋게만 듣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스스로 싫기도,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가진 장점도 있으니 최근엔 그냥 스스로 좀 냅두기로 했다. 어쨌든 타인의 편향된 사고 흐름이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또 습관처럼 스스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편향이라고 할 지, 내로남불이라고 해야할지, 그 지독한 특성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러워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타인과 소통하지만, 그 속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은 얼마나 있을까. 그런 가치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입에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린 사실 다들 ‘내 입장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있지 않나. 아니 애초에 생각하기 이전에 정보를 받아들이는 단계에서부터 그 필터링이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나. 근데 또 그걸 마냥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패턴에 너무 안빠지려고 해도 우리 유약한 인간은 쉽게 마음이 병들어버리곤 한다. 진심으로 나보다 타인을 우선하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여 사는 우리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권장할 만한 사안인지 나는 회의적이다.


그렇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스스로를 보호해주는 장점이고 다 좋다 이거다. 근데 그게 조금만 임계치를 넘어가면 자기 자신을 헤치고, 타인을 헤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너무 많은 미움들이, 갈등들이, 판단들이, 편견들이, 저 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 입장에서’ 생각한 것을 망각하고,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증오에 찬 목소리들이 많은 이들을 억울한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지 않나 우려스럽다.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은 입장이 다른 집단들에 대해 그런 기준들을 서로 만들고, 서로를 그 기준에 맞춰서 감시하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어제는 친구 오늘은 적이라는 말이 생각나듯이, 어제는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타인을 찌르던 이들이 오늘은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서로를 찌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편향을 경계하고 다른 입장을 고려하라’라는 예쁜 말로 해결하기에,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내가 편향된 생각을 가진 것인 것, 그래도 이건 보편적으로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걸 구분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음은 나도 정말 매일 매일 느끼는 것 같다. 각자 내가 받은 상처가 더 크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한걸음만 거기서 떨어져 생각해 보자는 정도의 목소리도 양비론, 양시론, 기계적 중립 같은 단어들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쉬움을 자주 느낀다. 그리고 나도 때때로 그런식으로 정당하다기보다는 어리석은 방향으로, 엄한 사람에게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겠지.


가끔씩 전부터 나는 사람들을 보며, 저마다 상처받았다고 절규하는 고장난 인형들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저마다의 덤덤한 표정의 가면이 있는 것도 느낀다. 타인이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 혹은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성숙한 것이기에 그렇게 하겠다는 어떤 비장한 의지 같은 것들. 아니면 나에게 고통을 준 불특정 다수의 ‘너희들’에게 가진 분노를 애써 감추고 살아가는 가면들. 물론 이 문장들로 표현된 온도보다 낮은 온도의 감정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상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늘 완벽하게 다루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 생각보다 각자의 페르소나의 가면 밑에 감춰둔 미움과 분노가 많다는 것을 요즘은 체감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나는 이해받고 싶지만, 타인은 쉽게 비난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해해줬으면 좋겠지만, 타인은 별로 이해해주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 너는 날 이해해주지 않냐며 니가 문제라고 서로를 보고 소리지르지만 애초에 서로의 말은 귀기울여 안 듣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뭐 대단한 대안이나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좀 슬프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계속 적고 있다. 자기 연민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자기 연민이 없는 사람은 없듯이, 우리 인간은 참 어려운 존재인 것 같다.


‘믿을 만한 사람과 마음을 나누라’는 말을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많이 들었다. 그게 왜 좋은지는 말로도 체험으로도 알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에 있는 리스크도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가까운 사람도, 마음이 잘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은 ‘내’가 아니다.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건드려지면 크게 틀어지거나 마음을 닫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이들은 ‘마음을 나눈다’는게 늘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각자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타인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자신의 동굴로 들어갈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닫는 사람들을 쉽게 바보같다고, 겁쟁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나아가는게 멋있다는건 너도 나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늘 그럴 수 있을만큼 강인한 존재는 아니다. 경험에 따라서 누구든 그런 시기를 겪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실전에서 성격, 환경, 경험, 입장, 정체성 등 여러모로 나와 다른 타인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괜히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나도 글에서야 이런 스탠스의 생각들을 표현하지만, 일상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스스로의 편향과 미움들을 마주하고 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운 감정과 판단들의 홍수에서 너무나 많은 헷갈림과 의심들이 피어난다. 그러고 나면 과연 성찰하는 것으로 문제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 현타가 올 때도 많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나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섞여서 살아갈지. 차라리 선과 악이 보다 분명하다면 얼마나 편할까. 미워할 수 없는 이들을 지금보다 훨씬 쉽게 미워할 수 있다면. 하지만 편하지 않아서 다행인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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