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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인간같아서 징그러운 영화

영화 <버드맨> 리뷰

by 새벽녘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휴머니즘 드라마를 싫어하지 않지만 휴머니즘 드라마가 못 긁어주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인간 마음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깝고 그런 작품들에 대한 리뷰도, 그런 방향의 생각들도 이 곳에서 종종 남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찝찝하다. 인간도 세상도 아름답기만 할 수 없다. 분명 아름답지 않은 면이 있음을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보기 싫다는 이유로 계속 외면하고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도심의 어떤 예쁘고 유명한 곳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해놓고서 어느 후미진 골목에는 걷잡을 수 없이 쓰레기가 쌓이게 방치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시간이 더 지나면 그 후미진 골목은 결국 큰 사회문제가 될거다. 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탐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찬가만 하고 싶어 한다고 진짜 도움이 될 통찰을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불편한 부분들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탐구하는 예술 작품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오늘 이야기 할 <버드맨>은 그런 영화 중 하나인 것 같다.


인간은 감정과 욕망의 동물이다. 당연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이를 적나라하게 인정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저렇게 하면 안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법한 언행들을 실제 인간은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할까? 나도 남도 그런 모순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을 관찰하며 굉장히 긴 시간 인지부조화를 겪어왔다. 당장 인터넷만 보면 학교 폭력은 없었어야 한다. 직장 내 따돌림도 없어야 한다. 갑질도 없어야 한다. 불륜도 물론이다. 그 곳에선 아무도 그런 것들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본 세상은 어땠나? 나이 불문하고 약자는 무시하고 강자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동경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그런 모습이 수도 없이 연출되는 곳이었다. 사회적 기준에서 옳지 않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이들 그런 언행들을 불사하는 곳이었다. 다소 강한 예시를 들긴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전에서 옳다고 생각하는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그런 추한 모순들을 관찰하며 쌓이던 인지부조화는 결국 인간의 발달한 포장 능력에 비해 인간은 감정과 욕망에 생각보다 훨씬 충실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뭔가 아무리 그래도 그럴리가 없다고 계속 생각을 반복하니, 내 의문은 풀릴리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인류는 긴 시간동안 발전해왔을지도 모르겠다. 도덕과 윤리에 대해, 법과 제도에 대해, 평등과 자유에 대해, 사랑과 인권에 대해, 삶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이성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끊임없이 대화해왔으니까. 너무 염세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글쎄, 내가 느끼기엔 인간의 발전한 이성적, 논리적 대화 능력에 비해 본능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못하는 것 같다. ‘이성은 감정을 합리화하는 도구’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런데 나 자신, 그리고 내 주변. 나아가 더 멀리까지 세상을 관찰하면 굉장히 일리있는 통찰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자신의 감정적인 호불호, 욕망, 두려움을 인간은 사실 어쩔 줄 몰라 한다. 꺼내놓자니 초라하고, 억누르자니 나중에 터져나온다. 대신 우리는 멋있는 이성과 논리 뒤에 숨는 법, 논리와 이성으로 이런 것들을 포장하는 것에 능숙하다. 가끔은 ‘내가 뭔가를 배척하는 것은, 뭔가를 추구하는 것은 한낱 유치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굉장히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대회를 보고 있다는, 그런 이상한 느낌을 문득 받을 때도 있다. 당연히 모두가 다 그런 면이 심한 것은 아니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모두 그런 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모순들은 쌓이고 갈등도 쌓인다.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미디어에 나와 해리 G.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책을 설명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설명을 보니, ‘개소리’라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느낌은 정당화하고 싶을 때’ 하게 된다고 한다. 이성으로 감정을 합리화시키는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 개소리가 너무나도 만연하다고 했다는데 솔직히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나도 꽤나 하는 것 같다.


멋있는 철학과 이상주의는 많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찝찝함을 주는건 인간의 수행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정신적 맷집 또한 생각보다 그리 뛰어나지 않다. 긴 시간 인류가 열심히 포장해온 것에 비해(물론 포장하지 않고 그냥 인정하자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인간은 수많은 인간찬가와 이상주의를 배신해왔다.


근데 인간이 감정적이고 욕망을 따르는 존재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뭘까? 나도 오만하게 이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드는 것은 뭔가 더 고차원적인 것에 이끌리고 그런 것들에 기뻐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왜 누군가는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들에 주로 만족하는데, 누군가는 다르냐, 왜 그런 차이가 생기냐고 물으면 사실 난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아픈 것은 어쨌든 우린 모두 이 사회라는 곳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주 그랬듯이 서론이 길었다. 서론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이유는, 이 <버드맨>이라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런 딜레마들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렇다. 리건의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고 해체해서 그렇지, 사실 리건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버드맨’이라는 인기 영화 시리즈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과거의 영광도 잊지 못하고, 현재는 고고한 예술적 재능에 대한 인정도 관심도 같이 받고 싶어하는 한물 간 배우 ‘리건 톰슨’도 그렇고, 천재적인 연기력을 가져 연극계의 아이돌이지만 일상에서는 방어기제와 쿨병이 심하고 반사회적인 면모가 있는 ‘마이크 샤이너’도 그렇고, 쿨해보이지만 어떤 것에도 열정이 없고 매사 무기력한데다가 마약 중독 과거까지 있는 리건의 딸 ‘샘’도 그렇고, 최고의 평론가로 불리지만 예술가들에 대한 비틀린 열등감이 심한 ‘타비사 디킨슨’도 마찬가지다. 리건만 인정욕구에 미쳐있는 사람이라고 뭐라 하기에는 여기 있는 인물들 모두 한 발짝떨어져서 보면 다 나사 하나 이상 풀려있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다들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다만 그걸 그걸 우스꽝스럽게 볼거냐 말거냐의 여지는 있다. 인간은 남의 이상한 점, 우스꽝스러운 점은 잘 찾아내지만 자신이 그런 줄은 잘 모르기도 하니까. 이 인물들 모두 나름 페르소나라는 가면으로 자신의 유약함, 찌질함, 유치한 감정이나 욕망, 두려움 등을 감춰보려고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투명하게 잘 보인다. 동시에 관객들에게 불편한 점들을 자극할 수 있다. 어떤 면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인간같고, 또 자신같기에. 자신의 추한 내면에 솔직할 줄 모르고, 포장에 익숙한, 하지만 그 포장 안의 내용물이 때론 투명해서, 때론 흘러넘쳐서 잘 보이는 그 안타까운 모습이, 비록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소름끼치게 자신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때때로 그랬다. 그 공감대는 별로 유쾌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징그럽고 역한 어떤 구역질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이나 후련함도 동반한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그런 어딘가 꼬인 인물들은 2시간 가량의 러닝타임동안 거의 쉬지 않고 서로 갈등하고 모욕한다. 서로 유대를 느끼는 씬들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다. 모든 갈등 구도가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리건과 평론과 타비사 디킨슨의 갈등이었다. 연극을 앞두고 리건은 술집에서 글을 쓰고 있는 타비사 디킨슨에게 다가가 잘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타비사 디킨슨은 충격적일 정도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상업영화에나 출연했던 대표 이력을 가지고 이제와 예술가랍시고 인정을 구걸하지만 예술에 대한 이해나 공부는 되지 않은 리건 당신을 혐오한다며, 타비사 디킨슨은 역사상 최악의 평을 써서 이 연극을 끝낼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어떻게 보면 선전포고에 가까운 으름장을 내놓는다. 연극을 보지도 않고 자신에 대한 인식만으로 자신의 커리어에 큰 흠집을 내겠다는 타비사의 말에 폭발한 리건은 완전히 흥분해서 타비사를 모욕한다. 대체 어떻게 살아오면 평론가가 되는 것이냐며, 잃을 것도 없이 타인의 노력의 결과물을 난도질하는 일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와야 할 수 있는 것이냐는 식으로 그녀의 본질을 부정한다. 평론은 잘난척하며 낙인이나 찍는 것이지 별 노력도 없는 행위이고, 굉장히 게으르고 편협한 것이라고 모욕한다. 이전 씬들중에 마이크가 타비사에게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나 평론가가 된다는 식으로 그녀를 도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그녀의 본질과 열등감에 대해 극 중 두 번 날카롭게 공격당하는 것이다. 그녀는 평소 성격답게 거의 무대응에 가까운 차가운 온도의 대응을 한다. 그런데 쿨한 척하는 평론가는 정말 그런 모욕앞에 괜찮을까? 그런 척하는 것에 프로페셔널인것일까? 리건의 모욕 앞에 그녀는 흔들림이 있어보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예술을 평론한다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감정은 메말라 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런 척 기를 쓰는 것이 일종의 방어기제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이 영화는 불편하지만 흥미로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비하인드를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초라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는 일은 불편하기도 안타깝기도 안심되기도 역겹기도 한 기이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쉬지 않고 누군가의 등 뒤를 쫓아가서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삶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두려움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지,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부분들마저 관객에게 공개해버린다. 리건과 마이크는 배우고, 타비사는 평론가다. 리건은 한 때 잘나갔던 배우고 지금은 연극을 도전한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눈에는 부지런하고 열정있는 예술가로만 비춰졌을 수도 있다(물론 누군가는 한물 갔다고 비아냥 거리겠지만, 세상엔 또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마이크는 연극에 진심이고 실력도 뒷받침되는 배우다. 그래서 누군가가 보기엔 자기 소신이 뚜렷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만 보일 수 있다. 타비사 또한 누군가가 보기엔 최고의 평론가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인물들의 백스테이지를 모두 보여주면서 한 인간으로써 초라해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고발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그리고 인물들 중에서 가장 적나라한 비하인드를 보여주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 리건이다. 영화에서는 내면 속에서 올라오는 솔직한 감정과 욕구를 버드맨의 목소리로 연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외면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운 자기혐오, 인정욕구, 초조함, 분노와 후회 등이 시시 때때로 밀려 올라온다.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난다’같은 말을 거울에 붙여놓고 되새겨보지만 자신의 진짜 솔직한 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버드맨은, 그러니까 내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과거에 대단했던 너가 뭐가 되었는지 보라며, 솔직히 자기소신이나 예술적 세계 추구 같은 것 보다는 사람들의 인정, 사랑, 찬양 등이 훨씬 너가 원하는 것이고 달콤한 것 아니냐며 리건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리건이 나르시시스트인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는 살짝만 얘기하고 넘어가자. 사실 나는 <서브스턴스>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다. 서브스턴스의 주인공이든 이 버드맨의 리건이든 본인이 불건강한 나르시시즘과 인정욕구에 빠져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더 건강한 가치관과 사랑, 관계에 집중한다면 이런 지옥의 늪에 빠져나올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다만 그건 일리있는 말이지만, 설득력의 한계가 있는 시선이기도 하지 않나 싶다. 이들이 이전만큼 유명하지 않기에, 빛나지 않기에 받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그 간극에서 느끼는 이들의 공허함,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법한 인정욕구와 자기혐오 등을 고려하면 쉽사리 손가락질할 수 없다. 우린 때때로 너무 쉽게 함부로 말하고, 또 그런 말을 듣기도 하니까. 그 과정의 연속에서 생기는 방어적인 태도와 사랑받고 싶은 초조한 마음을 ‘더 건강한 나르시시즘, 자존감 등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며 판단하고 나르시시스트라고 낙인 찍어도 되는 것일까. 솔직히 많이들 정도의 차이지 이런 모습 또한 자기 내면에 있지 않는가?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건강한 정신 상태일지 모르지만 또 이런 마음을 공감할 수 없다는 면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다만 리건과 서브스턴스의 주인공이 원했던 것은 과연 사랑일까 인정일까. 이 둘은 구분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그 경계란 모호한 것일까. 그 과정이 이해가 되건 안되건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불건강한 것이라고 인정을 해야하는 것인지, 두 영화의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계속 고민했지만 나는 여전히 헷갈리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사실 리건이 꿈꾸는 인정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 부수는 대사를 그의 딸 샘이 극 중에서 뱉어내고 만다.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리건은 샘에게 접근하지만, 마약 치료 센터에서 나온 딸이 대마초 냄새를 풍기는 것에 격분해서 다그치자, 샘은 자격도 없으면서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이 심화되자, 리건은 자신은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한다며 호소하지만, 샘은 이를 무참히 짓밟는다. 이 연극도, 아빠도, 사실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뼈가 있던 말이, ‘사람들이 사실 관심있는건 연극 끝나고 커피 어디서 마실지’라는 대사였다. 그리고 아빠는 사람들을 무시하지만 아빠는 사람들한테 존재하지 않는다며,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SNS 조차 하지 않는 아빠는 존재감이 없고, 아빠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고 특별하지 않다고 일침을 놔버린다(물론 터뜨려놓고 바로 후회하는 표정을 지어버리긴 하지만. 엠마 스톤은 연기를 정말 잘하는 것 같다). 진짜 뼈를 때리다 못해 부셔버리는 일침을 쏟아내고 퇴장한 엠마스톤 뒤로 리건은 무너진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의 허무함은 수도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지적되어 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실 남에게 크게 관심이 없기 떄문이다. 연극을 보러와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지만 진짜 그 연극에 크게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샘의 말마따나 사실 그들이 정말 관심있는 것은 적당히 심오한 연극을 본 후 ‘자신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카페가 어디일지도 모른다. 유튜브 댓글을 보다가 인상 깊었던 댓글이 있는데, ‘남의 눈치를 계속 보게 되면서 자랐는데, 나중에는 사람들은 다 너한테 관심없다고 무안준다’라는 글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이다. 모욕이 싫고 칭찬과 인정이 좋아서 그렇게 노력해왔는데 사실은 별 관심도 없었다니(…). 인간이 모두 자기 자신이 중요하고 자기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 크게 느껴지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남 욕도 칭찬도 별 생각 없이 하지만, 자신이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는 세상의 전부처럼 그게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냥 별 관심 없이 했을 확률이 높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이 세태에 리건과 같은 마음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냥 인간은 감정적으로 사실 약하니까. 그리고 자기중심적이니까.


리건의 일은 계속 꼬이고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목받게 되고 굴욕을 당한다. 폼나게 연극이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잠깐 가운을 입고 담배피러 나갔다가 문이 닫혔는데 가운이 문에 끼이고, 다시 연극 프리뷰로 돌아가기 위해서 속옷 차림으로 뉴욕 한복판을 질주한다. 그리고 이게 트위터에 올라오고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전에는 팩트로 아버지의 뼈를 갈아버리던 딸 샘이 위로를 하게 된다. 자신이 마약 중독 치료를 받으며 들은 말이라는데, 이 두루마리 전체 휴지가 지구의 존재 기간이라면 인류의 존재 시간은 고작 휴지 한 칸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근데 글쎼, 나는 이 말이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그리 크지 않음을 직시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을 분명히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나는 한 명의 유약한 인간 아닌가. 나한텐 나의 삶이 나의 전부인데, 쉽게 초연해질 수 없다. 객관적으로 나는 세상에 비해 한참 작은 존재여도, 나에게 나는 작지 않기 떄문이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그리고 이후에도 리건은 계속 꼬이고 앞서 언급한 평론가의 연극 사형 선고 예고로 인해 기분은 최악이 되고 만다. 지쳐버리고 절망해버린 리건은 결국 본 연극에서 진짜 총을 가지고와서 자살을 시도하고 만다. 연극 엔딩 대사 마저 리건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대체 왜 난 사랑받을 수 없지?’,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같은 대사들 말이다. 리건이 이 연극이 빌어먹을 나의 삶의 축소판 같다고 하소연 하는 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느낄만도 하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내몰리고 내몰린 리건이 진짜 총을 들고 들어가서 그 씬을 연기하다 헛웃음일 짓다 자신의 머리에 쏘게되는 심리 묘사가 숨도 못쉬고 보게 될 만큼 몰입되었다.


리건은 코가 날아갔지만 죽지 않았다. 병원에 누운 리건이 들은 소식은 타비사가 리건이 연극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극찬을 한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건의 엔딩 앞에 당시 관객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치료받게 된 리건에게 비로소 사람들은 모두 주목하고 극찬하고 또 쾌유를 바란다며 관심과 인정, 사랑을 쏟아낸다. 이 영화를 좀 우화처럼 본다면 이 상황은 진짜 헛웃음이 나올만큼 머리아프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다. 정말 허무할 정도로 타인은 얼마나 구경거리인가. 그렇게 관심과 사랑을 원할 때는 그런 것들이 오지 않지만, 자신의 인생이 끝날 수 있는 비극을 자극적인 구경거리로 전시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니. 애초에 타인은 구경거리인가. 사실 미디어나 SNS에서의 오랜 행태를 보면 그걸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전에 대학에서 미디어 비평이라는 수업을 들었을 때 ‘예능에서는 똑똑한 사람 별로 안 보고 싶어한다. 멍청하다고 욕할 우스꽝스럽고 만만한 사람 보고 싶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린 미디어에서 타인의 못남을, 부족함을, 비극을, 몰락을, 나락을 소비한다. 잘나가는 유명인에게는 인기와 사랑, 동경과 인정이 따라붙지만 동시에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난 시선, 뭐 하나만 걸려라는 시선도 동시에 따라붙는다. 추락하는 유명인에게는 손가락질과 비난, 증오와 혐오의 시선이 따라붙지만 동시에 안도하는 듯한 시선, 통쾌하다는 듯한 시선, 유희거리로 즐기는 시선도 따라붙는다. 근데 이걸 단순히 잔혹하고 천박하다고 비난만 할 수 있는가. 우린 예외없이 그런 추한 본능에 종속된 존재들인 것을. 리건의 안타까운 상황과 별개로 또 리건이라고 예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선할 방법을 찾고 논의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근데 사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논의들이 절실한 것일 수도 있다, 잔혹한 본성을 조절을 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니.


그래서 결국 리건은 그토록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을 마주한다. 이딴식으로나 해야 인정해주는건가? 나를 이렇게까지 파괴해야? 그리고 내가 얻고 싶었던 것들이 이딴 광경들인가? 아니 이런 마음들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영화 내내 얻고 싶었던 것들을 얻었지만 기뻐하지 않는다. 그의 변호사 친구가 신나서 병실에 소식을 전할 때도, 기사와 뉴스로 사실을 확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병문안 온 딸에게 마음을 전하기는 한다. 공연 때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러 가기 전 이혼안 아내에게 마음을 전했듯이.


돈이든 인정이든 무엇이든 있어보기 전까지는 그걸 가져본자가 막상 가지면 허무한 것이라고 백번 말해도, ‘넌 있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거야’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결국 가지게 되면 자신도 허무의 혼란에 빠지는 광경도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가 보다. 선례가 있고 데이터가 있고 교훈이 있어도, 지금 내 마음이 절실하면, 무언가가 너무 욕심하면 시야는 흐려지고 좁아진다. 일단 가져봐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다른 말들은 기만이고 가식이고 거짓이 되기에. 하지만 가진 이후에는 이전에 가져봤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다.


'당신은 그럼에도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얻었나요?'
'네'
'그게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구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 레이먼드 카버의 ‘레이트 프래그먼트’ 中

-영화 <버드맨> 도입부에 나오는 문구


이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문구인데, 리건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그가 얻어낸 것은 사랑인가. 어쨌든 진저리나는 투쟁들 끝에 뜻밖의 경로로 원하던 것을 얻게 된 리건은, 허무와 실소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고 웃다가 병실의 창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버드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서. 그러곤 창문을 한 번 올려다 보고는 무엇을 봤는지 씩 웃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허무에 도달한 리건이 선택한 결말은 무엇일까? 정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가? 아니면 샘의 시선을 따라 이를 초월한 버드맨, 영웅이나 초인 같은 존재가 된 것인가. 이에 대한 해석은 일부러 안 찾아봤다. 샘이 위를 올려다보며 웃는 것을 보니 이걸 자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엔딩이 아닌가, 리건이 앞으로는 버드맨으로 대표되는 내면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엔딩으로 봐야할까라고 생각도 했다가, 또 그냥 마지막 엔딩은 그냥 그런 의미까지 없고, 판타지적 연출을 활용한 열린 결말일 뿐일까하는 생각도 했다. 아니면 샘의 표정은 페이크고 그냥 리건이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난 이 영화에서 결말이 중요한가 싶다. 리건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달려나가는 그 과정에서의 고통과 발버둥, 그리고 결국 도달하는 허무.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리건은 어리석은 면이 많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몰입이 잘되고 공감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과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들 속에서, 더 나은 목표와 마인드를 가지고 살려고 노력도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내면의 감정과 욕망은 이를 따라와 주지 못하고 방해한다. 그리고 타인의 자극과 자신의 유약한 내면 앞에 휩쓸리며 별로 멋있지 않은 삶의 흔적들을 계속해서 남기고, 이를 또 되새기며 괴로워한다. 근데 그러기도 하는게 사실은 진짜 인간의 삶이 아니냐고 감독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들 각자 나만 아는 내가 있을 것이다. 남들 보여주려고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고, 이성과 논리로 멋드러지게 설명하지도 않은 날 것의 나, 내 감정, 내 욕구. 이걸 타인과 대화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지만, 나만 아는채로만 장기간 방치하면 악취를 풍기며 썩어나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나 책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않나 싶다. 많이들 아닌 척하지만 그냥 또 많이들 사실 이러고 사는구나. 그렇게 확인하고 간접적으로 소통하고 나면 좀 해소되면서 썩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번엔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졌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건강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한다 어쩌구’ 이런 교훈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설령 맞는 교훈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다만 막을 수 없는 희로애락의 파도들 앞에, 원하지 않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들에 괴로워하면서도 뚜벅뚜벅 자기 길들을 가는 사람들을 응원해주고 싶다. 여기엔 나 스스로도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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