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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긴대로 살고 싶으면서

by 새벽녘

나는 생긴대로 살고 싶으면서 왜 남은 고쳐야한다고 생각할까. 그도 그냥 자신은 생긴대로 살면서 왜 나를 고치려 드는걸까. 미성숙하고 잘못된 것들은 왜 이렇게 많은걸까. 마땅히 노력해야할 것도, 이것만큼은 하면 안되는 것들도 왜이리 많은걸까. 심사위원은 왜이리 많고 저마다 다른 채점표들은 왜 그리 복잡한걸까. 왜 이리 숨막히는 것들이 많을까. 왜 때론 내 기준만 맞는 것 같을까, 멀리 떨어져서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의 말들에 그렇게 길게 마음을 썼을까, 그 또한 자기 단점 뻔뻔히 들키며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걸까, 그리 믿어 보는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안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게 나름 고친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서 고치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이전만큼 위압감있게 느껴지질 않는다. 다만 내 안에도 저런 마음들이 있는 것 같아 더 없이 불쾌하고 불편하다.


왜 획일화가 싫다면서 정답이 없으면 불안할까. 답이 따로 없으면 내 시야에 있는 것들을 답이라 믿으면서 사는건지, 그래도 되는건지, 어차피 저 이도 그 이도 그러고 사는 것 같은데 그래도 되는지 묻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질문인지. 멋대로 거창한 기대와 기준들을 인간에게 덮어 씌워 버리곤, 전혀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강박증처럼 불안해한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살기 싫지만 좀처럼 낙관주의나 박애주의로 살 수도 없어, 목적지를 일은 것처럼 그냥 그 사이 밋밋한 공간에 별 수 없이 표류한다.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생각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본능같은거라면 과연 다른 본능을 가진 타인이 제어하려드는게 맞는건지.


그를 기분좋게 할 땐 나의 장점이던 것이 그를 기분 나쁘게 할 땐 어느새 반드시 고쳐야 할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되는 것인지. 나 또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엔 그런 변덕스런 사람이었는지. 수백번의 경험과 수십권의 책에서 비난할 거리를 세련되게 뽑아내도 출처가 기분이 상해서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게 애초에 문제거리가 되는지, 안되는지. 그저 비슷하게 느끼는 이들이 모여 낄낄거리며 뒷담화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인간적이고 좋은게 맞는지. 나 정도면 성숙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게 유행처럼 번진 건강한 자존감에 도움이 되는게 맞을지, 그렇다 쳐도 그게 과연 타인에게도 좋은 일이 맞는지. 그냥 믿고 싶어 믿던 이런 것들이 오늘처럼 의심스러운 날에는 깊이 사색을 해봐야하는 것인지부터,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괜히 피곤한 생각을 그만둬야 할 지까지도.


기분 좋게 누군가와 웃고 떠들고 마음을 주던 내 모습만이 건강하고 비로소 성숙해진 모습이라면, 그 여집합은 필연적으로 없애야 할 부분, 못해도 감추거나 부끄러워 해야 할 부분이 되어버린다. 칭찬을 기다리던 어린시절처럼 내 일부분을 숨죽여 밀어놓고 그들을 애타게 쳐다봐도 그게 무의미한 일임은 진작부터 알았다. 객관적이라는 뉘앙스에 숨어서 타인의 개성을 기분좋게 말살시키려던 시도를 너무 많이 봤고, 그 부끄러운 흔적엔 나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사이에 객관적이라는 기준들은 너무나 많이 생겨났으며, 그 중 하나에 갇혀버리면 애써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어두운 오지에 이곳에만 조명이 있는 것 같아서. 어차피 많이들 그러고 사는데 굳이 밖으로 나가봐야하나 싶지만, 머물기만 하고 마음 속 찝찝함을 외면하면 어린아이 마냥 인정을 기다리던 그 마음처럼 금방 허무해지고 만다. 바깥세상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조명이 있는 다른 공간들도 있는걸 알게되면 구석으로 감췄던 우울같은 것들이 그리 나쁜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또한 객관적이거나 답이되는 기준은 아니겠지만.


나는 자기 기준대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언제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거울의 일부 속에 모습을 보인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은 통제해야 하는게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저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들은 잘못된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걸까. 수많은 채점표의 기준대로 우릴 개조할 수 있다면, 모순되는 여러 기준들을 제조법에 우겨넣어 우린 모두 획일화된 이상적인 인간들이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누군가가 소외되고 배척당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째 기괴하고 거부감이 들며 과연 그게 좋은걸까 싶은 무서운 위화감도 들지만. 근데 어차피 그럴 일도 없으니 의미없는 상상이다. 가능성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에서 사람들은 각자 내가 맞다고 믿으며 살테니까. 틀렸다는 말을 잘하지만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을 못견디면서. 미움받는 것에 의연해지라고 말하지만 실은 의연해지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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