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의 폭력성

by 새벽녘

그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스스로를 수많은 타인들 속에 던져놓고서는 기꺼이 상처받을 줄도 알고 싶었다. 근데 또 솔직한 마음으로는 뻔히 보이는 균열들을 외면하고 떠밀려가는 심정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서는 의연해지려 발악하고 싶지 않았다. 대범하게 타인의 말을 웃어넘길 것, 의도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함께 열 번을 웃었으면 서너번 마음을 후벼판 이야기를 들은 것을 잊어줄 것, 두려움에도 먼저 누군가의 고유함을 끌어안아줄 것, 완벽하지 않은 무언가를 다그치지 않으면서도 꽁해있지 않을 것, 도망가지 말 것, 방어적으로 굴지 말 것, 주고서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말 것. 그에게 사랑은 응당 인간이기에 자신 또한 당연히 가진 가장 고귀한 욕구이자 가치인지, 정상적이고 꽤 괜찮은 사람이기 되기 위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너무나 원하고 추구해야만 하는, 그런 숙제같은 것인지 자주 헷갈렸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흠결없이 어여쁜 말들이나 아들러의 책에서 나올 법한 사랑 예찬들은 전에 없던 따뜻한 열정과 기대를 일깨우는 촉매제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덕스레 부패해 망설이는 순간의 자신을 거칠게 비난하고 몰아세우는 창 끝이 되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사랑 예찬론자들이 억압적이고 강요적이라고-솔직히 말하자면-그렇게 느낄 때도 있었다. 애써 그렇게 느껴서는 나쁜 것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겁을 줘봐도 이미 머물다간 솔직한 감상은 뒤늦게 지어낸 거짓말들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불안해보였으며,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낙인을 찍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폭력적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것이 폭력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폭력이겠는가. 하지만 입 밖으로 이 불결한 생각을 꺼내서는 안된다. 사랑을 사랑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 비겁하게 고귀한 가치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들의 과실이 절대적으로 높을 것이 너무나 자명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상식처럼 요구해도 되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사랑해줄 것을. 마음이 닫힐 것 같은 고통을 당연하듯 감수하고 다른 타인들에게도 무결하고 무해한 마음들을 쉼없이 나눠줄 것을. 이 아름다운 것들은 결코 폭력이 될 수가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됐던 것이다. 머릿 속에서 의문이 공백없이 피어나고 억눌린 화들이 고개를 들어도 그렇다. 오만하다, 오만하다, 그 말들이 머릿 속에 자꾸 떠다녀도 그러다간 정말 이상한 사람인 것일까 그는 겁이 났다.



그녀는 그의 방어적인 태도가 싫었다. 혼자만 찔려본 것처럼 늘 과민하게 구는 그의 부족한 용기가 싫었다. 어쩌면 한심했다. 사랑은 그런 이기적이고 편해 빠진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다면성을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가장 충만하고 위대한 가치였다. 내가 의도치않은 미숙함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찌르기도 하고, 나를 침잠시킨 고통과 상처가 때로는 오해나 의도치않은 타인의 미숙함에서 온 것을 안다면, 사랑을 해보겠다는 그 시도는 충분히 해볼만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가로등 없는 밤의 시야처럼 캄캄하고 막막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을 누군가와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이다. 이건 그녀에겐 선택할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불행하기로 선택했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게 솔직한 마음이라면, 마치 그의 다문 입과 뒷모습같은 빌어먹을 방어기제를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던지 불태워버리던지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토록 한심하고 겁이 많은 그를 이유도 모르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사랑해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행복하길 바랬다. 그런데 이런 말들에 설득되는 것 같다가도, 또 이유없이 자주 우울해지는 것 같은 그를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흉터 하나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의 모습이 꼴보기 싫었지만 그녀는 기꺼이 그의 그런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끔 겁이 났다. 도저히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불필요한 그 우울들을 뒤집어쓰고 그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질까봐 이따금씩 숨이 막혔다. 그녀는 그에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와 같이 고독을 이야기하는 어두운 것들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그의 고유한 체질을 바꿀 수 있는건지 사실은 확신하지 못해 두려웠다. 그녀가 본 그는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도 행복해질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문처럼 되뇌어봐도, 그 모든 게 의미없는 것일까 억눌러지지 않는 공포심에 견디기 어렵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을 좀처럼 존중할 수 없었다. 자신과 다른 개체의 다른 의견을 나름대로 인정해주는 것은 분명 그녀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이었지만, 사랑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마치 과학법칙을 왜곡한 것처럼 위태롭고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폭력적인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고, 너 또한 경험해본 적 있지 않느냐고, 내가 준 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번엔 좀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때까지 그를 사랑할 인내심이 그녀에게 남아있을까. 그가 자주 뒤집어써서 숨는 이불같은 우울이 어떤 것인지 그녀 또한 알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세계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서 일순간도 접해볼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사랑을 아름답다고만 볼 수 없어 괴로웠다. 자신이 그런 인간이라 아름답다는 예쁜 말을 두고 폭력적이라는 힘빠지는 단어나 사랑 옆에 가져다 붙이고 있는건지, 스스로의 감상에 의심이 들어 허무한 비참함을 느꼈다. 그에게는 이 또한 자연스러운 자기혐오 사유였다. 이게 정말 의지의 문제라면 자신의 의지가 부족한 것이 싫었고,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녀에게 그녀처럼 많은 것을 돌려줄 수 없는 자신의 황량한 정체성이 싫었다. 그에게 결국 사랑이라는 개념은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학대하게 되는 어려운 의무라는 점에서, 또 다시 폭력적인 것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