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얘기하게 될 말들을 생각하는걸 최근 몇년간 굉장히 금기시하며 살았다. 이런 종류의 강박이 없는 누군가가 보기엔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 되게 별거아닌 생각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잘못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조금씩 이런 생각이 올라올때마다 애써 억눌러왔다. 그런데 이젠 나의 기존 사고 방식에 스스로 반발할 수 있게 되었고,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다 숨통을 트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살기 위해, 그리고 이 강박을 속시원하게 털어내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리고 혹시 나랑 비슷한 사람에게 위안 또는 막혔던 숨을 내쉴 곳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나는 근 몇년간 사랑 예찬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삶의 정수는 사람과의 관계이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감정과 마음을 나눠라.' 대략 공통적으로 이런 메시지들이 많았다. 상처받고 아파도, 따뜻하고 관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완벽하지 않은 타인과 사랑을 주고 받으라니.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좀처럼 거절할수가 없었다. 그 근거들은 설득력이 있었으며, 또 그 메시지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울림이 컸다. 또 그 메시지를 얘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통찰력도 좋고 마음도 따뜻한 멋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살면서 어떤 가치관이나 태도를 가지고 살지, 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문학, 심리학, 철학에 관심을 가지며 저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몇년전부터 저 목소리들을 내 내면의 나침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건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누군가와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이 많아졌으며 마음은 보다 충만해졌다.
하지만 늘 그럴수는 없었다. 내가 주변 사람들과 나눈 사랑은 때때로 과분하게 느껴지는데, 왜 나는 다시 뭔가 답답하지. 왜 누군가에게 실망한게 길어지다가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잘 돌아오지 않는지, 대화하다 보면 왜 누군가는 다시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시도를 해보고 싶지도 않을만큼 미운지, 왜 나는 때때로 방어적으로 변해서 분명 사랑했던 그 사람들을 전혀 만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지, 그리고 때로는 실망과 상처, 권태를 반드시 이겨내면서까지 지켜내야할 만큼 이 사랑이라는 가치가 숭고하고 위대하기나 한건지. 좋지만은 않을 수 밖에 없던 일련의 경험들을 하며 나의 내면에는 이러한 의심들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거야. 어떻게 사랑이라는 가치를 의심하고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안하려해. 너의 그 부족함과 비뚤어짐이 너와 타인을 상처주고, 결국 언젠가 너를 후회하게 할거야, 왜냐하면 삶의 정수는 관계이고 사랑이니까. 니가 꼬인거야, 니 방식이 잘못된거야, 니가 너무 방어적이네, 니가 너무 예민하네, 니가 아량이 부족하네, 니가 이해를 못해주네, 니가 감정을 못받아주네, 니가 회복탄력성이 부족한거야, 니가 자존감이 낮은거야. 내 내면에 생겨버린 강박적인 사랑 예찬론자는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를 몰아세웠다. 야, 도망가면 안돼. 야, 이해해보려 해야지. 야, 무조건 대화를 해보고 다시 사랑을 해보려 해야지.
인간의 마음이 좀 간사하기도 하다는 것을, 상황과 내 상태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좀 덜 폼나고 덜 위대해도 그게 더 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다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날들이 좀 적었을까? 내가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까지 주려고 한 마음들인걸 안다면 참이나 그 상대방이 기분이 좋겠구나 이젠 그런 생각도 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그런 생각은 금기였다. 노력의 문제처럼 느껴졌고,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강박적인 사랑 예찬론자가 말하는 이상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건 굉장히 파렴치하고 잘못된 인간인것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내심 되게 오만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념은 물론 멋있다. 입장과 상황에 따라 쉽게 태도가 바뀌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정말 쉽지 않은 길이다. 내가 긴 시간 동경해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건 잘못하면 스스로의 유연성을 앗아가며 고집이 되기도 하고, 통제욕과 만나면 강요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난 이들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면, 나와 다른 스타일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강박에 빠진 나는 이런식으로 사고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사랑에서 멀어지는 어리석은 인간이 될까 두려웠다.
내 내면의 사랑 예찬론자는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다. 오만한 태도로 스스로에게 아름답고 이상적인 태도를 강요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이니 그 강요가 괴로워도 참아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참으며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어쩌면 타인에게 말은 안했지만 그 기준에 관계에 있어 타인의 인간적인 결함이 느껴지는 감정이나 태도도, 오만한 태도로 판단하고 고치고 싶어했고,그게 은연중에 티나 났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내 강박은 관계에서 지쳐하고 도망가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마주할때마나 더 쎄게 나를 질책했다. 뭐 마음을 나눠라, 기대고 의지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제 내 마음 속에서는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내가 태도나 신념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보니 워낙 뭐든 강박적으로 풀어내려했던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의무들이 잘 수행되지 않을때마다 답답하고 무거운 심적부담감이 쌓여갔다. 내가 뭔가 잘못된 인간인것 같다는 생각. 왜 난 요즘 별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가 않지, 왜 요즘 별로 누군가의 힘든 얘기를 듣고 싶지가 않지와 같은, 어떻게보면 그냥 인간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느낄수 있는 감정과 욕구를 속시원하게 느끼지를 못하고 살았다.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비난은 강박이 있는한 내 의지대로 사라지거나 안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한가지 기준만을 성역처럼 여기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나 싶다. 사실 좋은 철학적 논의들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다른 좋은 철학적 논의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관계를 강조한 아들러가 있다면 고독을 강조한 쇼펜하우어가 있듯이 말이다(좀 주제에 맞게 예시를 들려 했지만 정면으로 논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 철학자들간의 견해가 완전히 상충되진 않는다는 것은 알고있다). 근데도 이 사랑만큼은 마지막까지 놓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그 아름다운 가치를 놓을수가 있냐, 얼마나 어두운 인간이길래 그러냐는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고압적인 태도의 사랑에 대한 예찬과 강박은, 마치, 내 입맛에 딱맞는 반찬이 모든 인류에게 절대적으로 제일 맛있는건데 왜 너는 이 맛을 모르냐고, 그정도가 아니라고 느끼면 니가 무슨 문제있는거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사람 또한, 삶 또한 그런데 어찌 자기 입맛만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에서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태도나 선택은 계속 달라지는 것을. 달라져야 숨을 쉬고 인간답게 산다. 신념을 넘어선 강박은 나를 옥죄고 숨쉬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은 소중한 것이지만 나는 더는 신성시 하지 않는다. 더는 그러고 싶어도 의문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다. 자존감, 회복탄력성이 사실 요즘엔 무슨 의무나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랑과 굉장히 맞닿아있는 키워드들인데, 이런 개념들이 시야를 넓혀주고 자신을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않고 무슨 시험점수같은 압박을 느껴야하는 것이 된다면 나는 주객이 많이 전도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또한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면서, 시니컬해지면 안되고 타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말들'은, 당연히 좋은 의도이고, 좋은 지혜들을 담고 있지만-삶의 과정들에서 계속 지키는 태도로 삼으라고 하기에는-너무 가혹하고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추면 좋겠지. 타인에게 과도한 기준을 요구하며 상처줄 일과, 스스로 괜히 높은 기준을 가지고 남에게 불필요하게 실망할 일을 줄여줄테니까.
근데 기대치를 낮추고 사랑하는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살면서 어쩌다보니 여유가 없어지고, 타인에게 실망도 반복해서 하게되고, 그래서 건강한 수준으로 기대를 낮췄다면, 일단 할만큼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그리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시기에 어찌 타인을 진심 다해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것도, 인류애라는 것도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한 문장에 수많은 고통과 고뇌를 가볍게 퉁치기에는 그 실제 경험들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더라도, 상처나 실망이 생기더라도, 그게 크게 느껴지지 않아 마음을 줄 수 있을 때 주는게 더 낫지 않을까. 솔직히 답은 모르겠지만, 억지로 생기지 않는 마음을 쥐어짜내는 것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이 곳 브런치에 써서 올린 단편 소설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의 폭력성'이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 같기도 하다. 강박을 털어내야겠다고 생각하기 이전, 여러 혼란과 의문을 억압하지 않고 꺼내놓기 시작했을때 쓰게 된 글이었다. 사랑을 버거워하는 인물, 사랑을 예찬하는 인물, 두 인물 다 내 안에서 나왔다. 내 안에 있던 두가지 면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내 두 과거들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한때 한창 사랑 예찬론자가 되어갈때는, 상처받아 고독을 추구하는 듯한 댓글을 보며 은근히 나도 모르게 바보같다며 비웃고 가르치려들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했다. 그 당시의 감정을 회상하며 만든게 사랑을 예찬하는 인물이었다. 또 어떻게든 강박에 의해 사랑을 붙잡으려 하지만, 사실은 너무 그 의무감과 압박이 괴로워서 힘들어하던 당시의 나를 바탕으로, 사랑을 버거워 하는 인물을 만들었었다. 이제는 둘 다 보내주고 내 안을 비우고 싶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이 그렇다고 고독을 일방적으로 예찬하려고 쓴 것은 전혀 아니다. 고립이나 혐오를 선택하자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고싶은 것도 아니다(물론 그것들도 때론 필요할 수 있겠지만 추구하자고 하기엔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고는 생각한다). 난 이제 강박을 버리고, 사랑을 내가 줄 수 있을때 줄 수 있을만큼 주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모든 고통들을 항시 숙제처럼 내주고 그렇지 않은 이를 비난하는 이가 혹시 있다면, 그 좋은 건 그냥 댁들 많이 하라고 말해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난 또 숨막히게 살아갈 것만 같다. 사랑할 자유가 있다면, 때로는 그렇지 않아도 될 자유도 있지 않을까. 관계와 사랑에 대한 압박과 공포에서 벗어나,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많이 더 기울여 봐야겠다. 내가 혹여 잘못된 인간일까 두려워하는 필터를 지우고, 좀 더 맑고 깨끗한 시야로 세상을 보며 내가 원하는 것들이 시기마다 무엇이 있을지, 열린 마음으로 탐구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