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의 비율이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한 인간이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3요소는 성향, 운, 선택이 아닐까?
같은 경험을 해도 성향이 다르면 전혀 다르게 소화한다. 전혀 다른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례들이 환경만능론이나 의지만능론을 반박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사람마다 위험회피 성향과 자극추구 성향의 비율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 비율의 차이가 삶의 방향성에 어떤 영향을 줄지 추론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운 또한 꾸준히 대두되는 주제이다. 흔히 말하는 '환경'을 포괄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변수들이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많이 겪은 사람, 나쁜 환경에서 나쁜 변수들이 작용해서 나쁜 결과를 많이 겪은 사람. 우린 이게 우리 삶의 가치관과 선택에 영향을 안미친다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기마다 다른 경험을 하면 한 사람도 시기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전부는 아니다. 성향에 따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다르게 해석하고 활용하며,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니 말이다.
마지막은 선택이다. '의지'나 '노력'을 포괄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또한 '책임'과도 굉장히 밀접한 키워드일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선택의 비율이 크다고 생각하면 어떤 관점을 가지게 될까? 내가 어떤 성향을 타고났건, 운이 얼마나 좋았고 나빴고 환경이 어땠건, 결국 인생은 본인이 선택한 것이라는 관점을 가질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관점은 양날의 검이다.
좋은 면을 먼저 탐구해보자. 이 관점은 미시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미시적으로 보면, 성향과 운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 삶의 태도와 방향성을 내가 원하는대로 이끌수있다는 희망을 준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느끼게 하며 삶을 살아가는데에 생생함을 느끼게 해준다. 거시적으로 보면, 어떻게보면 '핑계'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차단하며,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유지하게 해준다. '성향이 이래서...', '환경이 이래서...'라는 말에 '그럼에도 다 그런 선택을 하는건 아니다. 결국 삶은 본인 선택의 영향이 가장 크다'라고 반박을 하며, 사회의 질서를 헤칠 언행을 지양하게 할 수 있다.
이렇듯 선택의 영향을 크게 보는건 좋은 관점이기도 하지만, 삶과 인간에 대해 간과하는 부분도 많고 그렇기에 위험할 수도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성향과 운, 환경이 선택에 영향을 많이 주지 않는가? 성향과 운은 한 사람의 관점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교육으로 해결하라고 하기엔-물론 일리있는 이야기지만-세상엔 정보도 관점도 너무나 많고, 세상과 변수는 복잡해서 깊게 파고들수록 뭐가 맞고 틀린지는 흐려지고 애매해지는 경우가 많고-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지 편향을 가진 존재이다. 편향을 가진 뇌, 그리고 어느정도 자기중심적일수 밖에 없는 감정은 망망대해같이 넓게 펼쳐진 세상에 무수히 많게 떠다니는 정보들을-정도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결국 편식하게 만든다. 그렇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이미 그건 성향과 운과 무관하지 않다. 성향과 운의 탓만을 할수도 없지만, 선택을 이들과 전혀 무관한 어떤 성스러운 영역으로 분류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이다. 저마다의 관점과 이상이 달라지는 것도 변수지만,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대로만 실천하고 살지는 못한다. 수많은 세상의 불합리함과 부조리 앞에, 고통과 억울함을 겪으면서, 꼿꼿하게 가야할 길만 가는 경우는, 글쎄 내 생각엔 거의 없다.
물론 '당위'는 중요하다. 선택과 의지를 강조하며 당위를 지켜야하라는 메시지가 없다면, 우리 사회는 질서와 윤리가 없는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이걸 그렇게 예쁘게 소화하지는 못한다. 자기중심적이고, 편향된 부분도 많은 인간은 남에게는 당위를 강조하면서,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타협하고 핑계대며 당위를 지키지 않기도 한다. 내로남불이란 그렇게 탄생한다. 그렇다고 사회의 당위를 포기할수도,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컨트롤하지도 못하는 딜레마 속에 우린 모두 저마다의 내로남불을 흘리며 살아간다. 선택을 성향과 운보다 훨씬 많이 강조하는 관점은 너무나 필요하지만, 또 더없이 야속하기도 하다.
영화 <조커>시리즈에서 아서 플렉에게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라는 질타가 쏟아질때,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판사가 불우한 환경에서 엇나가고 비뚤어진 여학생들을 향해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라고 호통을 칠 때, 그 장면들이 그리 시원하지만은 않았던 이유. 악인에게 서사를 줘서는 안된다는 말들에 어제까지 격하게 공감하다가도, 어느날 어떤 흉악범들이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끔찍한 악의와 학대들의 연속의 연속을 원치않게 알게 되고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찝찝함이 생긴 이유. '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러면 안된다'는 사회에 꼭 필요한 '당위'와, '내가 진짜 저 상황을 겪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솔직하게 상상해봐도 생각만으로는 절대 죽었다 깨나도 짐작할 수도, 또 입증할수도 없는 '현실'의 간극이 느껴질때, 자신없는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선택과 당위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진짜로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는게 맞는지 금기시되는 의문을 품기 싫어도 품게 되었던 순간들. 내가 그정도로 괴롭지 않을때 뱉은 말들을, 그정도로 괴로운 현실을 진짜로 겪을때 어느정도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순간들.
물론 내가 어떤 악의에 대한 피해자라면 해당 사안에 이런 식으로 생각은 절대 못할 것이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어땠던가. 새로 개발된 끔찍한 범죄자 처벌에 반대하며, 자신의 집에 거의 죽다 살아서 온 주인공을 안타깝다는듯이 맞아주다가도, 그가 자신의 아내에게 더 없이 몹쓸짓을 했던 그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되고는 분노에 가득차, 자신이 반대하던 처벌 메커니즘을 이용해 복수를 하는 선택을 한다. 그가 이중인격이라도 되는걸까? 그런게 아닐 것이다. 그의 이중적 태도는 비판받아야 하거나 우스꽝스러운가? 혹은 위선적인가? 난 그렇다고 절대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서 관찰한 모습들, 입장에 따라 얼만큼 나의 생각과 태도가 쉽게 흔들렸는지, 나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얼마나 생각보다 뿌리깊게 자리해있는지, 나와 타인을 관찰하며 입장에 따라, 사안에 따라, 경험에 따라 얼마나 신념이나 객관성같은 것들이 자기 중심성에 의해 쉽게 무너지기도 하는지 보다 보니까, 이중적 태도와 내로남불에 대해서도 이전만큼 꼿꼿하게 비판하는 태도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딜레마들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의 영향이 큰가? 혹은 성향이나 운의 영향이 큰가? 아니면 인간 본성의 영역인가?
너무 극단적이고 무서운 예시들을 적은 것 같긴하다(대부분 영화나 드라마 예시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극단적이고, 또 명백한 도덕의 문제와 인간의 고통. 본성이 충돌하는 딜레마가 아닌 딜레마들이 사실 우리 삶에는 훨씬 많다. 그러니 그 영역으로 돌아와보자. 이상을 쫓으며 살 것인지, 현실에 기반해서 사는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지, 적당히 이기적이고 결점을 가진 사람으로 남도 봐주면서 실속을 챙기면서 살 것인지, 원칙을 지키는 것에 정체성을 느끼며 살 것인지, 이타심과 사랑을 동력으로 살 것인지 등등... 사실 이런 문제들에 답은 모호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래서 <데미안>같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며 계속 명작으로 읽히는 것이겠지. 워낙 극단적이고 무서운 주제들을 얘기하다가 오니까 상대적으로 가볍고 다 존중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상대적으로 들지만, 이 또한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주제들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훨씬 많이 갈등하게 만드는 주제들이다보니, 실제로는 더 예민한 주제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린 저마다의 답을 외치지만, 사실 난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맞고 틀림을 따지는 것에 공허함을 요즘 많이 느낀다. 양비론, 양시론, 기계적 중립, 상대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가 틀렸다고, 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없다. 나는 그 사람의 성향, 운을 모르기 때문에, 선택마저 내가 추구하는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수도 없기 때문에. 나는 다른 누군가로 안살아봤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고 내가 타인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내 성향. 내가 겪은 운과 환경에 기반한 관점으로, 나와 다른 이들, 내가 이해 안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분노하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굴기도 하며, 앞으로도 별수없이 어느정도 그러고 살아가겠지.
그런데 사실 그게 되게 이상적인건 아니지만, 꼭 되게 나쁜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애초에 인간이기 때문에. 전혀 안그럴것 같던 사람도 결국 저마다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느정도 그러며 산다는 것을 많이 보고 느꼈기 때문에(그래서 남의 좋은 말도 배울점이 있는 참고사항이지, 결국 섬길 것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내려간 기대치가 실망이라고 부정적으로 볼수도 있지만, 또 비슷한 결함을 가진 누군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힘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기도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어쩌면 그냥 그러기라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세상도 인간도 그리 밝지만도 어둡지만도 않다고 생각한다. 뻔한 말이지만 진짜로 그렇게 느꼈던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밝게만도 보고 싶어하던 시기도 많았고, 어둡게만 보고 싶에하던 시기도 많았다. 그건 애초에 감정때문에 그렇게 되는 면도 있고, 양쪽 다 저마다 다른 위안과 중독감을 줘서 그렇다. 밝게만 보고 싶을때는 그 희망과 낙관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어둡게만 보고 싶을때는 여기서 나가면 위험해지고 배신당할것 같다는 불안을 포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쪽에만 심취하면 세상에는 반대쪽의 변수도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보고싶지 않게 해 외면하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혼란 속으로 빠트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 다크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지만, 사실 또 성향, 운, 선택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는 싶었다. 이걸 한번씩 짚어주지 않으면 나는 또 쉽게 어리석어질 것만 같았다. 인간에게는, 사회에게는 보고싶지 않은 심연도 분명 존재한다. 저마다의 성향에는 저마다 다른 유형의 폭력성과 이기심이 잠재되어있고,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불운과 부조리가 가득하고, 또 사람은 많은 것에 휘둘려 좋지 않은 선택들을 한다. 그 심연이나 고통은 이런 언어들로 간단히 다룰 수 없이, 현실에서는 무겁고 아픈것이다. 하지만 그걸 외면하는 것도 부정확한 시선이지만, 그것만 보는 것도 부정확한 시선일거다. 성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 갈등과 화합을 통해 서로 이해하는 시간, 다른 것이 협력하는 시너지, 기분좋은 행운의 경험, 용기있고 따뜻한 선택과 사랑 역시 세상에 존재한다는걸 잊지는 않고싶다. 인간은 부정편향에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적어보면서 또 머리와 마음에 새겨본다.
그래서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게 맞을까. 그게 결국 내가 이 글을 쓴 출발점이나 역시나 쉬이 결론을 내릴수는 없다. 내 성향을 얼마나 이해하고 살지, 내 행운과 불운들에 어떻게 대처할지, 결국 내가 진짜로 의지로 선택할수 있는 영역은 어느정도일지, 그 영역 안에서 나는 혼란스러워하면서 어떤 것들을 고를지, 얼마만큼 확신하고 얼마만큼 헷갈려하며, 얼마만큼 만족하고 얼마만큼 후회할지. 타인의 성향, 운, 그로인한 선택을 얼만큼 포용하고 이해할지, 얼만큼 외면하고 미워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냥 내 앞에 주어진 모든 실전들은 어렵고 모호하겠지. 그렇지만 이런 한번 한번의 성찰이 그냥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해주길 바란다. 사실 요즘 성숙하게 살려고 한다고 그게 과연 만족하고 행복스러운 것이 맞을지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정도 내가 할수있는 만큼만 하고, 내가 줄수 있는 만큼만 주려해야하나 싶은 생각들도 스친다. 한계를 넘어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언젠간 지켜야만 할 이상같기도 했으나, 이제는 시간지나 내가 그걸 진정 좋아할수없다면 굳이 그럴필요있나 해서 생각의 전환점이 온건가 싶기도 하다. 그냥 오늘도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같은 글이다. 누군가 읽을 수 있는 공간에 쓰는 것이 여전히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다지 타인에게 생산적인 글은 아니고, 그저 솔직한 생각과 마음만을 담았고, 내 감정의 승화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또 누군가의 현재 감정과 연결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