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 두 돌 무렵, 아이는 내가 하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고 자기 의사표현을 했다. 두 돌 까지만 키우면 한숨 돌리는구나. 딸과 엄마는 이렇게 친구가 되는구나.
그간의 고생이 어느새 빛이 됐다. 수묵 담채화 물감이 번지듯 잔잔히 찾아오는 기쁨이었다.
큰 애 20개월에 둘째를 임신했다. 제법 말이 통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적당히 나온 배를 내민 채 산책을 나섰다.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따스함이 있었다. 양쪽에 아이 손을 잡고 가는 행복한 엄마, 쯤을 상상했나 보다.
둘째가 태어났다. 아들이다. 30개월과 신생아를 오롯이 혼자 돌봐야 했지만 두 돌이라는 정확한 기준이 있었다. 두 돌만 지나면 돼. 두 돌까지만 참아보자!
아들은 두 돌이 지나자 길바닥에 누웠다. ‘그쪽은 집이 아니야. 이쪽으로 가야 집이야’라고 말한 직후였다.
“어머, 너 뭐하니. 쫌 웃기잖아”
명랑한 말투를 장착했지만 내 눈빛도, 표정도 전혀 명랑하지 않다. 등 뒤로 쭉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일어나라고 좋게 말했더니 그대로 한 바퀴 구른다. 러브스토리 찍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널 이렇게 키웠어?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야지! 복화술로, 눈빛으로 비명을 쏘아 부치는데 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가만, 나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아!
그레이 아나토미. 미국 시애틀 병원 의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주인공 메러디스는 데릭이 상사인 줄 모르고, 더군다나 상사가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진다.
데릭의 아내이면서 의사이기도 한 앨리슨이 시애틀 병원의 초빙 의사로 오고 메러디스는 졸지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유부남이란 건 알지 못했대. 아내가 나타나니 차인 거야”
“미쳤다더라”
“뭘 기대해”
“인과응보지. 인턴이 주치의와 데이트하다니”
“안된 것 같은데. 여기서 일해야 하잖아. 그 사람도 있고 다들 알고 있고..”
메러디스가 바로 저 뒤 캐비넷 앞에서 다 듣고 있었;;;
메러디스의 잘못은 없었다. 데릭이 혼자 시애틀까지 온 건 앨리슨이 데릭의 친구와 외도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데릭이 싱글 행세를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오직 ‘부인의 등장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메러디스’로만 집중했다. 메러디스가 어딜 가든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메러디스의 ‘나도 억울해. 몰랐다고’ 하는 하소연을 받아줄 사람은 동료 몇 명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들도 인턴 무게에 눌려 메러디스의 호소를 들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둘째가 길바닥에 드러누울 때마다 들리지 않는 환청이 귓가를 떠돌았다.
“쯧쯧. 저 엄마는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애가 길바닥에서 누워버려”
“애가 엄마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벌써 저러면 사춘기엔 훤하다 훤해”
내 잘못은 없었다. 눕기 전까지 큰애랑 똑같이 키웠다고 믿었으니까. 한 번 말하는 걸로 엄마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 건 남자아이들의 특징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길거리에 드러누운 아이와 수습 못하는 엄마에게만 집중했다. ‘나도 내 아이가 이럴 줄 몰랐어요!’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다. 그나마 남편은 가장 무게에 눌려 나의 호소를 들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둘째와 산책 나가면 눕는 꼴을 안 보려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했다. 덕분에 5분 거리를 30분씩 돌아가기도 했다. 산책은 허기진 사람처럼 시간을 와구와구 먹어치웠다.
그 와중에도 찻길로 간다거나 놀이터의 다른 아이가 갖고 있는 걸 막무가내로 달라고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안된다고 했다. 아이는 어김없이 누웠다.
누워서 몸부림치는 아이를 안고 가다가 휘청해서 내 무릎이 한 번 깨진 후로는 — 아이 머리가 아니라 내 무릎이 깨진 게 얼마나 다행인가 — 안고 갈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구석으로 옮겨 놓고 그저 기다렸다. 아이는 거기서 (누운 채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미리 준비한 책을 꺼내 그 옆에 앉아 읽었다. 주로 만화책. 읽다가 혼자 킥킥거리기도 했다.
지나는 사람들은 나와 아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나는 얼굴 반 이상 가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아이는 어느 날부터 누워버린 본인을 내가 구석으로 옮기면 그냥 벌떡 일어났다.
“안 누워? 갈 거야?” “응” “얼~ 멋진데! 가자”
애는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둥거리는데 어미란 사람은 책을 펼쳐 드는 것. 아예 나가지 않을 수도 없고, 애가 눕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모르고, 애를 불끈 들어 사람 없는 데까지 갈 수도 없었다. 대신 최대한 만화책으로 살았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 메러디스, 가 병원 공지사항처럼 떠도는데 당사자 메러디스는 병원에 출근을 안 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말을 못 하게 하는 방법도 모르고, 파랗고 깊은 눈이 더 슬퍼지는 데릭을 붙들고 싸울 수도 없었다. 대신 최대한 인턴으로 살았다.
나도, 메러디스도 지금 한 선택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랬던 순간이다. 그저 혼자 감내하는 시간이다. 뭐를 선택할지 몰라서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렸는데 시간 자체가 나를 대신한 답을 주기도 했다.
누워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는 둘째가 그랬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점차 휘둘리지 않는 메러디스가 그랬다. 나도, 메러디스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기다렸는데 답이 생겼다. 아이가 누울 때 (누가 이상하게 보든 말든) 책을 볼 여유가 생겼고 메러디스는 (호기심과 조롱의 시선을 받든 말든) 병원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여유가 생겼다.
아이는 자라면서 수없이 변한다는데 변할 때마다 길바닥에 누웠던 아이를 생각하려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수정이 필요한지 몰랐지만 버티는 속에서 답을 찾는 순간 말이다.
이 순간을 생각하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답을 찾을 수 없어도 지나갈 수 있음을 아니까. 내가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그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면 지나가는 일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