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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Dec 30. 2020

그 맑고 환한 밤중에가 어두울 때

'도'에서 '라'까지


매해 크리스마스는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였는데 2020년만큼은 ‘하늘엔 바이러스, 땅에는 거리두기’로 바뀌었다. 대체 지능조차도 없는 이 바이러스가 뭐길래 크리스마스조차 암흑으로 만드는 건지. 우리가 믿고 있는 과학은 실체가 있기나 한 건지.      

 

가만, 그런데 이 우울한 크리스마스 어디서 본 것 같다. 넷플릭스의 그레이 아나토미(Grey Anatomy. 미국 드라마)를 뒤진다. 시즌2의 12화. 우울한 크리스마스. 찾았다! I got it!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Sixpence None the Richer의 It came upon a midnight clear이 흐른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제목만 들어도 저절로 노래와 멜로디가 떠오르는 그 노래 맞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분명히 그 노래인데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을 떠올려보자.


장조와 단조

다장조에서 세 칸(도-시-라) 내려가면 가단조

장조 밝음, 단조 우울


이거 외운 기억이 나는지? 당신도 주입식 교육세대이군요.   


캐럴, 하면 떠오르는 대부분의 노래는 장조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도 당연히 장조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도 원래 멜로디에서 딱 두음만 빼고 그대로 부른다. 대신 반주가 다르다. 하프가 3연음으로 계속 나오는데 거의 [라-도-미]의 반복이다.


다시 초등학교를 소환한다.


가단조의 으뜸화음(=라도미)

[미-라-도]로 순서를 바꾸기도 함      


멜로디가 장조인데 어떻게 반주를 단조로 하냐고? 된다. 멜로디의 8마디째 마지막 음, 16마디째 마지막 음, 이렇게 두 음을 바꿨으니까. 그 마지막 음 ‘도’를 모두 ‘라’로 내렸다.       


물론 처음에는 모른다. 어? 왜 반주가 단조야? 그러면서 화면을 보는데 병원을 나서려는 메러디스를 데릭이 뒤에서 부른다. 가까이 온 데릭이 Are you ok? 하고 물었을 때 비로소 8번째 마디의 ‘라’가 나온다.   

   

죽어도 ok가 될 수 없는 메러디스다. 데릭을 보고 싶지 않은데 안 보면 보고 싶어 미치겠는. 누구보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데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메러디스니까. 그런 데릭이 불렀고 괜찮냐고 묻는다.


물으니까 ‘도’로 끝나야 할 캐럴이 ‘라’로 끝난다. 메러디스는 yes라고 대답하지만 노래가 no라고 대답하고 있다.

     

마음을 숨긴 몇 마디의 의미 없는 대화가 흐르고 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눈빛만 오갈 때, 우리에게 친숙한 마지막 멜로디가 흐른다.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물론 이 마지막도 ‘라’로 끝난다.


‘라’로 끝나자마자 메러디스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데릭도 똑같이 말하면서 양쪽으로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간다.

이렇게 바라보다가 노래 끝나면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양쪽으로 갈라진다. 으헝~


이 노래가 영상에 맞춰 편곡한 게 아니라면 분명 감독이 노래를 틀어놓고 노래의 마디에 장면을 맞춘 거라 확신했다. 아니라면 노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두 음의 위치와 인물의 동선이 어떻게 이리 맞아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메러디스와 헤어진 데릭은 병원 앞의 술집에서 닥터 애디슨을 만난다. (애디슨과 데릭은 부부다) 데릭이 애디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게 만들지.

상처 주려는 말이 아니야.
떠나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건 아니니까.

메러디스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어.
복수도 아니었어.
그녀를 사랑해.

당신과 함께 하기로 했다고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물론 애디슨이 먼저 잘못을 했다. 애디슨은 데릭의 가장 친한 친구를 침실로 끌어들여 한낮의 정사를 펼쳤으니까. 이를 목격한 데릭은 도망치듯 시애틀로 왔고 우연히 메러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제대로!   

    

뒤늦게 데릭을 잡고 싶어진 애디슨은 시애틀로 병원을 옮겨서 데릭을 설득 중이다. 데릭도 (이해되진 않지만) 메러디스 대신 애디슨을 선택했다. 메러디스가 대놓고 Pick me, Choose me, Love me(날 골라. 날 선택해. 날 사랑해) 했는데도 애디슨 편에 선다.


그랬으면 정을 남기지 말 것이지. 왜 그런 눈빛으로 보냔 말이다!라고 나는 보면서 짜증을 낸다. 그런데 데릭이 말없이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수그러든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짜증을 접게 하는 데릭의 눈빛


여기서 음악은 반주만 나온다. 멜로디는 없다. 이미 앞에서 세 번이나 귀에 박아 넣어서 없어도 있다.  단 한 번도 쉬지 않는 3연음은 데릭의 선택을 격렬하게 흔든다.


아니 왜 캐럴로 데릭을 흔들어! 하는데 장면이 바뀐다. 여기서도 감독이 노래에 맞췄다고 확신했다. 저 흔들리는 눈빛은 노래의 간주로 채웠고 닥터 버크와 양의 집을 비추면서 노래 한 번이 정확하게 딱 끝났으니까.

버크와 양


그러고서 화면 가득 크리스마스 전구가 반짝이고 ‘라’ 음이 3연음 위에서 대놓고 반복한다. 여기는 이지가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놓은 메러디스의 집이다.      


이지는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누워 반짝이는 전구를 바라본다. 메러디스도 따라 눕고, 나중에 온 조지도 같이 눕는다.


카메라는 전구를 비췄다가 전구 불빛에 음영 지는 셋의 얼굴을 비춘다. 4분 넘게 꾸준히도 나온 3연음의 자리가 바로 여기구나 싶다.      

트리 밑에 누워있는 메러디스와 이지. 들어오는 중인 조지


불규칙하게 깜박이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불빛과 3연음이 레고를 끼우듯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들어맞는데도 불안하다. 불안한 이유는 [미-라-도]로 바꿨기 때문에.      


기본 자리로만 반주하면 멜로디에 따라 너무 많이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화음의 자리바꿈은 이동의 효율성을 위해서지만 여기서는 일부러 바꾼 것 같다. 그것도 가단조의 다섯 번째 음을 강박에서 계속 강조하면서 말이다.


음계의 다섯 번째 음은 첫 번째 음 다음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첫 번째 음이 강력한 안정감인데 반해 다섯 번째 음은 강력한 역마살이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가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서만 널을 뛰니 불안함이 쌓인다. 데릭과 메러디스,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지와 알렉스까지) 모두 불안한 청춘들 아닌가.      


나만 유난인가 싶어 유튜브를 검색해봤다. 이 노래 링크에 달린 댓글에서 다들 그레이 아나토미의 장면을 말한다. 국적은 달라도 보는 마음은 비슷하구나 싶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날 여기로 데려왔다. 나도 그래요!!

 

그 맑고 환한 밤중에는 맑지 않을 수도 있다. 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바라보는 마음, 아름답지 않은 크리스마스여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마음. 그 마음에 그 맑고 환한 밤의 축복이 조용히 내린다.


데릭의 대사를 댓글로 남긴 사람들

  

메러디스는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어.

복수도 아냐.

메러디스를 사랑해.

당신에게 상처 주려는 말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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