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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22. 2021

부러우면 정말 지는 걸까

나도 떡볶이가 좋은데 말이지

<아무튼, 술>을 읽고 홀딱 빠진 나는 아무튼 시리즈를 게걸스럽게 찾아 읽었다. 게걸적이었지만 꼼꼼하지 않았나 보다. <아무튼 떡볶이>는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도 유명하니까 당연히 읽은 줄 알았으니까. 그러다 요조의 신간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으면서 아무튼 떡볶이를 안 읽었음을 알아버린 거지.


탓하는 사람도 없는데 자책하며 첫 챕터를 열었다. 처음부터 요조에게 지고 말았다. 나는 아줌마고, 섹드립에 대해 당연히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떡볶이집 간판으로 요조가 치는 섹드립을 못 알아듣는다니.(그의 괄호 설명이 없었으면 어디서 야한 거지? 하며 검색이라도 할 판)


읽기의 시작도 자책이었고 첫 챕터부터 자책?이었던 아무튼 떡볶이는 자학의 세리머니를 하기 좋은 책이었다. 나도 한 떡볶이 하는데(하긴, 대한민국에서 한 떡볶이 안 하는 사람을 찾기 더 힘들지도) 왜 내겐 떡볶이의 이야기가 없는 것인가. 말은 바로 하라고? 나도 안다. 떡볶이의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건져 올릴 뜰채가 없는 거다. 줄여말해 '안목' 같은 거.


 떡볶이를 좋아하는 것과 떡볶이를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에버랜드 범퍼카를 운전하는 것과 자차로 삼호가든 사거리를 한방에 통과하는 것만큼 다르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자학하는 건 팔 할이 부러움이었다. 내겐 왜 저만큼의 안목이 없는가. 괜히 떡볶이가 싫어졌다.


떡볶이와 와인을 먹으며 떡볶이는 죄가 없음을 인정했다. 더불어 부러움도 그만하기로 했다. 생의 어느 순간에는 분명 부러움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러움을 원동력으로 삼기에는 너무 피곤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쟤는 저렇구나, 엄훠. 좋겠네. 하고 까먹는다. 망각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된다.


부러움을 걷어내고 담백하게 다시 읽기 시작했다. 부러움이 걷힌 자리에 식욕이 꼼꼼하게 들어차서 요조가 말하는 떡볶이를 다 먹어 보고 싶었다. 물론 나도 안다. 식욕보다 귀찮음이 늘 먼저인 나는 그냥 집에서 먹고 말겠지. 떡볶이 하나 먹으러 저런 부지런을 떨 일은 이제 내 생애 오지 않겠지. 그래서 그저 감탄하는 마음으로 요조를 보았다. 떡볶이에 대한 마음을 저토록 반들반들하게 닦아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그의 뜰채, 아니 안목을 오래 들여다봤다. 깊은 우물에서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오듯 그의 이야기도 끊임이 없었다. 어쩌면 안목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나보다 얘가 떡볶이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수긍해버렸다.


요조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을 닮고 싶다.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살아냄으로 구체화하는 그 자세 말이다. 구체화하면서 살았으니까 그 흔한 떡볶이로도 이렇게 써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떡볶이를 읽었는데 막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런다. 역시 떡볶이는 위대했다.

떡볶이와 화이트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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