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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Feb 10. 2021

제일 비싼 가방은?

양씨네 딸이 들던 가방

   할머니는 1920년대에 태어났다. 할머니의 청소년기(가 이렇게 어색하게 붙을 줄이야)는 꽤 부유했나 보다. 학교를 안가는 여자들이 더 많은 시대에 가죽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양씨네 딸이었다고 하니까. 반경 몇 키로에서 아마 가장 비싼 가방일텐데 할머니의 호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열여덟 살에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당신 둘째 아들(우리 아빠)가 걸음마 하기 전에 돌아가시고 아빠가 기저귀를 뗄 무렵 6.25가 터졌다. 


   그 다음은 말해 뭐할까. 누가 누가 더 고생 했나 배틀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 그 난리에 할머니, 큰 아빠, 아빠 세 식구가 이산가족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할머니는 큰아빠가 결혼한 후에도 큰아빠와 같이 살면서 청소 일을 했다. 그러다가 셋째 손녀(나)가 태어났고 할머니는 그동안 청소일로 모은 돈을 다 큰아빠 주고 우리 집에 내려왔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내려와서 인생의 가장 행복한 때를 만났다고 했다.     


   느이 엄마가 얼마나 빠르냐면.
니 아빠, 니 엄마, 나
이렇게 셋이 아침을 먹잖아.
다 먹고 내가 화장실 갔다오면
설거지가 끝났어.
전날 니가 쓴 기저귀도
다 삶아서 파삭거리고.
싱크대엔 젖병 다섯 개가 있어.
당연히 삶았지.
더 기막힌 건
싹 말려서
분유까지 넣어놨더라고.
8시에 출근하면서
      으찌나 손이 그리 빠른지.    
 


냉장고엔 하루치 반찬이 넉넉했고
나갈 땐 현관 먼지까지
싹 훑어서 버리고 나가.
느이 엄마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것냐.
나는 니 엄마 덕에
말로만 듣던 인형놀이를
널 데리고 했지.
지금도 자려고 누우면
너 아기 때 기억이 생생해.
내 인생 가장 행복한 시절이야.”    

 

   할머니는 이 얘기를 할 때마다 꿈을 꾸는 사람 같았다. 나는 늘 찬물을 끼얹었다. 다 알면서 또 듣고 싶은 이야기라 그랬다.     


“할머니는 손녀만 넷이잖아.
엄마나 큰 엄마한테
아들 낳으라는 소리 왜 안 해?”

“머시매들은
고추 달린 유세 떨어싸서
꼴사나워.
니들이면 충분해.
너 키우던 시절이
     가장 꽃 같대도”     


   적어도 집에서 만큼은 딸이라고 받은 설움이 없었는데도 할머니가 이렇게 확인해주는 말이 왜 그리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게 인형놀이의 기억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인생 최고의 행복을 주었던 시간은 나의 어딘가에 같은 부피로 새겨져 있음을 믿는다.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어졌는데도 할머니라는 단어에 한 번씩 세상이 적막해진다. 적막의 끝은 사진 속의 할머니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끝난다.    

  

‘할머니, 내가 엄마 되는 거 꼭 본다고 해놓고선. 너무 일찍 가버린 거 아냐?’     


   노트북 자판의 손이 잠깐 멈춘다. 화면에서 깜박이는 할머니 글자가 너무 할머니같이 보이는 날, 이런 날은 그냥 노트북을 덮어야 한다. 할머니, 다음에 또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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