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Apr 06. 2021

첫사랑은 참치

못 자도 행복한 날

어찌 된 노릇인지 고3의 짝사랑은 뒤돌아서도, 앉아도, 일어나도 머리 한쪽을 잡아당겼다. 하도 세게 잡아당겨서 감히 누구에게 말할 엄두도 못 낸 채 애꿎은 일기장만 찢고 버렸다. 미쳐버리겠는 참치의 등장이다.

   참치는 참치 통조림을 맨입으로 3개를 먹어치웠다고 했다. 케첩도, 밥도 없이 오로지 참치 캔만! 큰 캔으로! 그 소문이 난 뒤로 참치의 본명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꾸준히 참치였다.

   참치면 어때. 멋있기만 한데!라는 말은 늘 속으로 삼켰다. 그러다 1월 어느 날의 통화 끝에 진짜 미쳐버리는 참치가 되었으니, 참치가 전부터 날 좋아했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사랑은 듣기에서 시작한다고 확신했다. 전화를 타고 오는 건 분명 소리인데 유치하게도 하트가 날아다녔다. 날아다니는 하트는 발바닥을, 배꼽을 연신 간지럽혔다. 듣기는 시각과 촉각을 움직이는 마법이었다.

   짝사랑의 시간은 괴상망측하다. 어느 때는 1분이 1시간, 어느 때는 1시간이 1분이 된다. 짝사랑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물의 나는 여주와 남주 자리에 나와 참치를 넣고 각종 로맨스 드라마를 그리느라 잠을 안 잤다. 할머니가 일어나는 4시를 기다렸다.

   “할머니할머니할머니이이이, 일어났지? 나 남친 생겼어!”
   “뭐? 뭐가 생겨?”
   “남친. 남자친구”
   “새벽 4시에?”
   “아니, 아까 할머니 잘 때 통화하면서 생겼어”
   “통화 허다가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게 무슨 뜻이여”

   나는 그간의 맘고생을 말했다. 말하다 보니 서러워서 눈가가 젖는다. 할머니 눈이 똥그래졌다.

   “아니 어떤 머시매가 우리 강아지를 울려”
   “울린 게 아니고 할머니, 오늘부터 남친이라고”
   “좋은 거 아녀? 근디 왜 울어”
   “아우, 이제까지 뭐 들었어. 그간 서러웠다고”
   “데려와. 좀 맞아야 쓰것네. 왜 우리 강아지를!”

   대화는 하고 있으나 이게 대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대화가 흘렀다. 의심스러워도 말을 쏟아내니 잠이 쏟아졌다. 잠들면서 다짐은 받았다.

   “할머니, 엄마한텐 말하지 마”

   기절하듯 잠들었다. 잠을 못 잔 최초의 날이면서 못 자도 행복한 최초의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중하게 갈겨버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