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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7. 2021

정중하게 갈겨버리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금요철야 때 스무 살의 나는 새로 산 민소매 옷을 입고 반주를 했다. 끝나고 악기 정리하는데 어느 장로님이 날 불렀다.

   장로님은 나의 복장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형제들 눈을 어지럽혀 은혜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내가 무슨 암홀이 허리까지 훅 파인 끈나시를 입은 것도 아니고 남자들 정장 와이셔츠에서 딱 소매 부분만 없는, 아주 평이한 민소매 블라우스인데도 그랬다. 그는 아주 인자한 얼굴로 말을 마치고 그 까끌한 손바닥으로 내 뒤쪽 팔을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스윽 훑고 갔다. 이 맥락 없는 스킨십은 무엇인가.

   "저기요,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은혜가 고작 반주자 팔뚝으로 가려질까요. 고작 팔뚝으로 못 받을 은혜면 그 형제 역량 문제 아닐까요. 아님 은혜 과소평가 든가요. 은혜와 제 팔을 쓰다듬는 건 어떤 연관일까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꾸는커녕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 고개도 못 들었다. 그의 손바닥은 소름 끼쳤으나 내가 잘못했으니 받는 벌이라고 자책했다.

   본인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은 약자가 된다. 그가 인자한 얼굴로 본인의 언어를 내게 강요할 때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나는 나의 언어 없는 약자였다. 만일 당시에 저렇게 대답했다면 나는 싸가지 없는 반주자로 찍혔겠지만 적어도 그의 논리에 한 번의 균열은 냈을지도 모른다.

   작은 균열보다 화끈한 폭발이 더 주목받는 사회이긴 하다. 그러나 폭발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균열마저 포기하면 영원히 나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남의 언어에 전전긍긍하는 약자로 살아야 한다.

  무례하게 치고 들어오는 남의 언어를 정중하게 갈겨버릴 작은 균열을 원한다. 각자의 정중한 갈김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흐르고 넘쳐 우아한 폭발을 만들어버리는 환상을 꿈꾼다. 지금 스무 살의 반주자들은 부디 저런 말을 듣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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