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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5. 2021

10년만에 쓰는 인공수정 이야기

기억해야 할 것

새끼손톱 반만한 클로미펜의 위력은 놀라웠다. 이걸 먹고 임신이 안되면 다음 달에 어마무시한 피를 본다. 넘치는 피를 내보내느라 한 달에 이틀씩 샤워기 아래 마냥 서 있었다. 바닥의 핏빛 행렬이 잦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수압 쎈 해바라기 수전은 눈물을 감춰줬다.

   클로미펜 석 달은 실패했으니 난임시술 지원 바우처 및 인공수정 스케줄을 상담 받았다. 상담실은 아이보리 한 방울 담은 화이트톤을 배경으로 찬란히 빛나는 초록식물이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높은 천장의 한쪽에서 들어오는 햇빛 한 줌의 위력이었다.

   저 빛 한 줌으로도 생명을 품는데 나는 그조차도 못하는구나 싶었다. 고개를 못든 채 서류에 서명만 했다. 직원이 휴지케이스를 내밀었다. 놀랍게 부드러운 휴지였다. 여기서 고개를 못 들었을 많은 여자들의 눈물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시술 당일, 대여섯개의 침대가 쭉 늘어선 방으로 들어갔다. 2번 베드 최은영님입니다. 라는 간호사 안내가 들리자마자 내 침대 커튼이 열렸다. 의사는 남편과 내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차가운 스테인레스로 입구를 뻐근하게 고정시키고 더 차갑고 긴 막대기에 실린 정자를 난포 옆에 가져다 놓았다. 1분만에 끝났다. 의사는 3번 베드로 이동했고 간호사는 5분 더 누워있다가 가라고 했다.

   5분을, 3주를, 12주를 기다렸고(12주까지 안정적으로 착상되면 난임병원에서 일반 산부인과로 옮겨간다), 9달을 기다렸다. 2010년의 일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채 기다렸던 날이 아득하다. 낳고 키우다 보면 그때의 기다림은 너무 작은 일부임이 뒤늦게 보인다.

   눈 앞의 일로 전전긍긍하게 될 때 2번 베드를 떠올린다. 당시는 내 세계 전부를 잠식할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면 어처구니없게 일부였다는 것을, 끊임없이 흐르는 인생에서 다른 그 무엇도 비슷할 거라는 것을 2번 베드가 가르쳐 준다.

   그러고나면 숨막히는 지금의 어떤 문제도 조금 가벼워진다. 내게 늘 필요한 건 현재에 충실하면서 현재에 너무 잠식되지 않는 것, 그 이중 시선의 유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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