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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3. 2021

웃음에 코끝이 찡해지는 날

1년 후

   

외할머니는 서랍에서 뭘 꺼내다 넘어지셨다. 골반 뼈 골절. 부러진 게 아니고 으스러졌다고 했다. 수술 및 보행 불가. 의사는 요양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정신이 멀쩡한데 오직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할머니에게 벼락같은 일이었다. 그 쨍한 정신으로 만난 소변통은 막다른 비참함이었을까. 간병인이 소변통을 버리러 간 첫 날, 할머니는 길석님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이 막돼먹은 것들. 니들이 이렇게 나를 버리는 거여!! 니들이 어떻게!! 썩을 것들! 너네는 자식도 아녀!!”          


끝없이 서럽고 억울한데 바뀌지 않는, 지나치게 견고한 한 달이 하루씩 넘어가고 있었다. 길석님이 할머니를 말할 때 허기 같은 체념이 묻어났다.      


“할머니가
전화를 잘 못 받아”
“할머니가 전화를 받아도
내가 누군지 몰라”
“할머니가 나를 만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한 달 만에 어떻게 사람을 못 알아볼 수 있을까. 의사는 뇌수술을 제안했으나 육남매 모든 자식들이 반대했다. 쌀쌀했던 늦가을은 성큼 겨울로 건너갔다.           


날이 풀리면 잠깐이라도 휠체어에 앉아 산책을 해보자고 했다. 너무 누워만 있으면 멀쩡하던 사람도 몽롱해지지 않겠냐고. 그렇게 봄을 기다렸다. 봄이 내비치기도 전에 코로나가 터졌다. 면회금지. 코에 연결된 호스로 유동식을 넣는다고 했다. 오늘내일 하고 계시니 어디 멀리 가지 말라고 했다. 정확하게 죽어가는 오늘내일을 1년간 쌓았다.    

       



1년 후 금요일 저녁, 부고소식을 받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외할머니는 ‘느이 엄마도 못한 아들낳기’를 내가 해내고서야 나와 마주보고 많이 웃으셨다. 다섯 명 손주 이름은 정확하지만 일곱 명 손녀 이름은 헷갈린, 그것도 외손주까지 챙길 여력을 허락하는 세대가 아니었으니까. 납작한 추억인데도 그 웃음이 자꾸 생각나서 자꾸 눈가가 뜨끈해졌다.  


날이 밝고 산소에 올라갔다. 할아버지 산소 옆에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느릿느릿 관을 넣었다. 관 뚜껑 위에 생화로 하트와 십자가를 그리는 동안 햇빛이 꽃잎 하나하나를 곱게 다듬었다. 빛을 담은 꽃잎이 유난히 선명했다. 햇빛이 엄마와 이모도 어루만졌는지 애끓던 울음도 잦아들었다. 꽃 장식이 끝나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한 삽씩 흙을 떴다. “할머니. 나랑 많이 웃어줘서 고마워요” 하고 흙을 덮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아이들이 유튜브를 보다가 웃음보가 터졌다. 평소엔 안 궁금한 나도 이번엔 굳이 물어봤다. 애가 말해주긴 했는데 나는 어디가 웃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인의 설명에 더 웃어버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빵 터져버렸다. 각자의 이유로 다같이 웃는 순간이었다. 차가 들썩일 만큼 깔깔거리느라 쌀쌀한 겨울 공기도 따끈히 데워지는 듯했다.      


그래, 이렇게 많이 웃자. 할머니에게 했던 마지막 인사처럼, 우리도 언젠가 오랫동안 헤어질 때 많이 웃어서 고맙다고 말하자. 그거면 될 거 같다.  

      

할머니가 먼저 닿은 죽음, 나 역시도 쉬는 날 없이 부지런히 죽음에 가닿고 있다. 누가 먼저 닿을지 모를 그 끝을 만났을 때 남은 기억은 오늘만큼 생생한 웃음이길. 웃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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