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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r 11. 2021

발크림을 머리에 바를 때 생기는 일

영감님과의 동침

번역가이며 작가인 언니가 영감에 대한 글을 썼다. 5km 뛰고 샤워를 하고 물을 뚝뚝 흘리며 인스타 피드를 보다가 갑자기 영감(inspiration)님이 왔다지.


아니 뭐 이런 뜬금없는 영감님이 다 있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라도 오면 어디냐 싶어서 일단 뛰고 샤워를 하고 물을 뚝뚝 흘리며 나왔다. 여기까진 다 따라 할 수 있다고.

인스타를 5분 넘게 보고 있는데 영감님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하긴, 인스타 본다고 영감이 오면 세상에 글 못 쓸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마음에 나는 얼른 수분 크림부터 챙긴다.


작가 언니는 강림하신 영감님을 맞이하느라 얼굴이 쩍쩍 갈라지는 것도 모르고 자판을 두드렸다지. 읽는 내가 다 얼굴이 아프다. 더불어 그 따를 수 없는 작가스러움이 멋있다. 난 멋있을 일이 없으니 나의 얼굴을 먼저 지키겠노라.

수분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말리다가 화장대 서랍을 열었는데 어머, 영감님이 서랍에 계시네? 얼른 두 손으로 받들어 블루투스 키보드를 켠다.




두 달 전쯤, 6주간 했던 발 깁스를 풀었는데 발등 각질이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씻어도 1시간 내로 싸리눈이 내려앉는 형상이라고 할까.


하도 씻어서 발등이 아플 지경이 되자 남편은 발크림을 주문했다. 집에 남아도는 바디크림 많은데 왜...라고 하지 못했다. 괴로워하는 마눌을 생각해주는 그만의 방식이다. 괴로워도 잘 안 움직이는 내가 문제일 뿐. 딱 두 번 쓴 발크림은 그대로 서랍에 방치됐다.


애 둘 수유는 몸의 모든 수분을 가져갔는지 머리카락도 푸석해졌다. 모근 5센티 아래로는 늘 푸시시하다. 단발을 하기엔 더 감당이 안돼서 질끈 묶고 다녔는데 질끈 묶는 게 탈모의 주된 원인이라네?


한 때는 머리 묶다가 넘치는 숱이 고무줄을 끊어먹었지만 지금은 아기 고무줄로도 자연스레 묶인다. 자연스러움이 슬퍼지는 날이다.

탈모의 ‘탈’만 들어도 탈진할 거 같은 나는 묶지도 못하고 해리포터의 해그리드로 다녔다.

서랍의 발크림을 보고 갑자기 든 생각.

발등도 수분감이 없었고
머리카락도 그렇다면
발크림을 머리에 발라도
되는 거 아냐?

피부도, 머리카락도
따지고 들자면
둘 다 단백질이라며.
그럼 비슷한 거 아닌가.


헤어 에센스를 사자니 집에 플라스틱만 더 늘리는 일 같아서, 플라스틱 케이스의 발크림을 이대로 방치하면 또 그냥 버릴 거 같아서 든 생각 같다.


 아니, ‘생각’ 말고 ‘영감’이라 치자.

발크림을 적당량 덜어 머리에 발랐다. 바른 채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고 종이 구기듯 쥐었다 폈다를 몇 번 했다.


오왓! 탱글탱글 웨이브가 생긴다. 해그리드에서 스네이프 교수로 한 세발자국 옮겨간 정도?


이래 놓고 나왔더니 남편이 파마 새로 했냐고 묻는다. 우왓! 이 정도면 성공이다!

올리브 절므니에서 각종 헤어 에센스 샘플을 만지작거리다 한숨 쉬며 그냥 나오는 일을 이제 그만 해도 된다. 발크림을 필두로 굴러다니는 화장품 샘플, 바디크림 등등을 한 번씩 써봤더니 모두 스네이프 교수 쪽으로 서너 발자국 가기 때문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새 제품을 내놓는다. 그러려면 용도를 더욱 세분화해야 한다. 세분화된 상품들은 ‘정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세뇌시킨다.


너는 이런 게 필요해야 돼.
니 머리 좀 봐.
너 같은 해그리드 머리는
어쩌구 오일을 함유한
저쩌구 비타민으로
코팅해줘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한다. 듣고 있으면 틀린 말 하나도 없어서 소녀처럼 순진한 얼굴로 카드를 꺼내서 괴물 같은 플라스틱을 하나 더 들인다.


영감님 덕에 그들의 세뇌를 멋있게(실은 얼떨결에) 거부하고 돈도 아끼고 글감도 얻었다.  

영감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실 때는 오늘보다 좀 더 우아한 모습으로 오시면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네? 니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고요? 헙, 죄송합니다. 그냥 오고 싶은 모습으로 오세요.


우아는 제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볼게요. 쓰레기를 줄이는 것도 지구 입장에서는 우아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면 이 글도 우아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는 영감님 타령 그만하고 주변을 좀 더 세세히 들여다봐야겠다. 아직은 보는 눈이 좁아 나만 주야장천 들여다보지만 나를 보다가 쓰레기 줄이기라는 범지구적 관점까지도 가지 않는가.


그러니 세세히 보면서도 넓게 보는, 그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짓을 좀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




수분크림마저 포기한 작가님의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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