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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r 12. 2021

성별을 선택한다고?

<주간 문학동네>를 읽은 충격이란

3월 8일, 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라디오 <이미숙의 가정음악> 오프닝에서 ‘오늘이 여성의 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날도 있구나 하고 하던 주방 정리를 마저 끝냈다. 깨끗해진 싱크대처럼 여성의 날도 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며칠 후, <주간 문학 동네>에 이슬아 작가의 글이 실렸다. 남궁인 작가와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는 글이다. 여기서도 ‘여성의 날’이 나왔다. 아 맞다, 그런 날이 있었지. 깨끗했던 머릿속에 작은 흔적이 생겼다. 흔적을 갖고 글을 따라가다가 도저히 흔적으로 치환되지 않을 벼락같은 말을 만났다. 이슬아 작가가


저 역시 언젠가
아이를 낳을 예정입니다
... 성별을 선택해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라고 했으니까.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건 나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반대하지 않으니, 핍박하지 않으니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딸과 아들, 둘 다 키우는 엄마로서 중립적인 시각을 알려줘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이가 나중에 물어보면


 남자로 태어났지만 정신은 여자인,
여자로 태어났지만
정신은 남자인 사람들이 있어.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야.
바뀔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대.


라고 담담하게 말할 참이었다.      


알고 보니 거기에 아주 큰 전제가 있었다. 바로 내 아이는 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랬으니 아이들에게 ‘성별을 선택해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여부조차 판단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하필 천 생리대를 빨아 널어놓고 나와 읽은 글이었다. 생리대를 빨 때마다 내 아이의 생리 시작이 1년도 안 남았다는 자각을 하는 때에 ‘성별의 선택’ 같은 선택지가 들어올 틈이 있을 리가. 만일 내 딸이, 내 아들이 성별의 선택을 위해 화학적 수술까지 원한다고 하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현존하는 모든 수술은 되도록 신체 기관을 남기려고 한다는데, 아예 기능을 못하면서 다른 기관까지 침범하는 지경까지 와야 들어낸다는데, 그런 이유 없이 몸의 주인이 원하니 이 역시 선택의 범주로 들어갈까.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딸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혹은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으니 몸은 손대지 말자고. 선택에 앞서 의학적 지식을 먼저 공부해보라고. 건조하게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정도까지 가니 조금은 조용해졌다.      




이 글을 쓰다 말고 큰 애가 올 시간이 되어 부리나케 나갔다. 벌써 5학년이지만 집에 오는 길에 나와 재잘거리며 그날의 일을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날 역시 학교에서 본 여러 풍경을 자신의 언어로 치환해서 조잘대다가 미술학원 셔틀을 탔다.    

  

큰애를 보내고 집에 오니 그새 친구를 데려온 작은 애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 경주다. 큰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게임을 둘째는 괴성을 지르며 한다. 둘째에게 학교 풍경을 물어보면 늘 비슷하다. 재미있었어. 시끄러웠어. 별 일 없었어. 셋 중 하나다.


‘역시 여자애들은 주변을 찬찬히 살피고 남자애들은 주변 상관없이 본인 좋아하는 게임에서 승부만 나면 되는군.’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치가 쌓인 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슬아의 글을 읽으며 이건 성별의 차이가 아니라 그저 사람의 차이라고 봐야함을 알았다. 남자아이인데 주변을 꼼꼼히 볼 수 있고 여자 아이인데 승부게임에 집착할 수도 있다. 단지 확률의 차이일 뿐인데 차이점이 틀린점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높은 확률 쪽이 얼마나 폭력적이 되는지, 그게 폭력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되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게임 결승점을 눈앞에 둔 아이는 아마도 엄마일 듯한 전화를 두 번이나 그냥 끊어버렸다. 흔히 있던 일이다. 내가 그 집 엄마에게 전화해서 아이 스케줄을 확인했다. 시간맞춰 내보낼 테니 걱정 말라했다.


그 와중에 남자애들 다 그렇죠 뭐, 소리가 전처럼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올라온 말을 황급히 밀어넣고 ‘너무 집중하느라 전화받을 생각을 못했나 봐요.’라고 말했다.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기어이 알고야 마는 것. 알고 나면 불편하지만 내 식으로 소화시켜 되도록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어른의 일일지도 모른다. 마흔을 훌쩍 넘겨놓고 이제야 어른에 대해 생각하다니 늦어도 한참 늦은 지각생이다. (이슬아 작가는 이제 서른을 넘겼다지)      


서둘러 더 어른이 되어야겠다. 아이의 스케줄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내 언어와 생각을 들여다보며 폭력일지도 모르는 말을 핀셋으로 건져내야겠다. 건져내도 필히 까먹을 테니 건질 때마다 기록해야겠다. 열심히 써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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