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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r 08. 2021

작가에게 꼭 필요한 자질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하여>를 아직 읽기도 전에





    나른한 토요일 오후. 주말답게 하루 종일 뒹굴다가 해가 꺾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나 5킬로미터를 달리고 왔다. 곧 밤이 올 것이고, 술 생각이 날 것이고, 하루 종일 누워 넥플릭스를 보다가 술을 마시면 내가 나를 너무 미워하게 될 것 같아 최소한의 양심을 급히 발동시켜 후딱 나가 달리고 온 것이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고, 그 좋은 기분으로 술을 한 잔 마시겠고, 그러다 달리기 전까지 나를 미워했던 마음은 잊고 다시 나를 조금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큰하게 잠들어야지. 그것이 나를 위한 주말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벌건 얼굴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달릴 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장대비로 변해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방 안이 습한 것 같아 서둘러 에어컨을 켰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빗방울은 데굴데굴 굴러 창틀에 착지했다가 살짝 튀어올라 감쪽같이 사라졌다. 머리에 대충 수건을 두르고 사라지는 빗방울을 잠시 눈으로 좇다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혹시 샤워하는 중에 급한 메시지가 왔을까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이왕 전화기를 든 김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확인했다. 그러다 맛있는 커피와 쿠키, 뽀글뽀글 할머니 얼굴이 그려진 책 사진에서 손길이 멈췄다. 나도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책이었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의 감상이 꽤 도움이 되기도 하므로 올린이가 연필로 밑줄 그어 놓은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든 직업군으로든 가장 악랄하고 경멸스러운 작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작가들이 직접 쓴 책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사랑하지도 않아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은 작가와 한 거울을 공유하지요.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갑자기 머리에서 수건이 풀려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창문을 더 세차게 두둑 거리기 시작했는데, 방금 읽은 그 문구마저 내 마음을 둥둥 두드리는 그 모든 상황이 지극히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나를 조금 미워하다가 달리고 와서 다시 조금 사랑하게 된 내게  애트우드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작가들은 자기를 가장 사랑하면서 또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 딱 나잖아! 역시 난 작가일 수밖에 없어. … 그러니 얼른 글을 써. 하루 종일 놀았잖아!’


    물론 노벨상을 타신 작가 할머니의 의도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나에 대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오락가락 헷갈려하던 내 마음을 애트우드 할머니가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거다. 작가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것. 지금 내가 위태롭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 외나무다리가, 이러다 굴러 떨어지는 거 아닐까 불안해하며 서 있는 그 다리가 결국 작가로 가는 이중성의 다리겠구나, 싶었다. 


    사진을 한 장 넘겼다. 책의 뒤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작가가 서 있는 위치라니. 나야 이제 막 출발한 새내기 작가라 고개만 돌리면 출발선이 보이는 위치인데, 애트우드 할머니 같은 작가는 지금쯤 어디에 서 계시는지 궁금해졌다. 당장 장바구니를 열어 주문해야지, 생각하며 다시 한번 창밖을 내다본다. 그 주문의 과정에는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한 판단이 서너 차례 더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외배송비’를 부담해야 하는 위치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애트우드 할머니가 말씀하신 위치 역시 그 위치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머리에 수건만 두르고 책상에 앉았으니, 게다가 에어컨도 켰으니, 그사이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 건조해져 쩍쩍 갈라진다. 그래도 의자에 한 번 붙은 엉덩이와 이미 키보드의 리듬을 타고 있는 손가락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작가의 손가락답게 부지런히 움직인다. 유명한 작가들은 일찍 일어나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을 쓴다고, 그래야 오래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샤워하고 나와 머리의 물기를 털다 말고 갑자기 글을 쓴다. 사실 그럴 때 더 잘 써진다. 장수할 작가는 못 되려나. 하지만 뭐 어때. 피부의 생명이라는 수분 공급까지 포기하면서 쓰기를 멈추지 않는 나야말로, ‘영감님’이 오는 순간을 붙잡아 이렇게 글로 남기고 있는 나야말로 진정한 작가가 아니겠냐며, 괜히 텅 빈 방에서 헛기침을 해본다.




    


아, 그 영강님은 그러니까 영감 inspiration인데, 그 영감에 대해 말하자면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테드 강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은 작가나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개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미지의 장소에서 불쑥 나타나 도와주는 신성한 혼 덕분이라고 생각했단다. 


    로마 사람들을 이를 ‘지니어스 genius’라고 불렀는데, 이 지니어스는 집요정 도비처럼 벽장에 숨어 있다가 작가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나타나 작업을 도와주고, 더 중요하게는 그 작업의 결과로부터 작가를 보호해준다. 작가가 작품과 거리를 두게 만듦으로써, 성공했을 경우에 과도한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게 하고, 실패했을 경우에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결과가 좋으면 지니어스가 도와주었기 때문이고, 결과가 나쁘면 지니어스가 제 할 일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모든 창의성이 순전히 ‘개인’으로부터 나온다는 합리적 인본주의가 시작되었고, 작가나 예술가들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지게 되기 시작했으니 이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영감님, 그러니까 지니어스의 특징 중 하나는 언제 올 줄 모른다는 것인데, 루스 스톤이라는 미국 버지니아의 한 시인은 시골에서 밭일을 하고 있으면 저 멀리 지평선에서 시 poem가 땅을 울리며 달려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펜을 들고 시를 받아 적어야 하는데, 한 번은 조금 늦어 시가 자기 몸을 관통하고 막 빠져나가버릴 찰나, 시의 꼬리를 겨우 붙잡아 당기면서 부지런히 받아 적었는데, 다 적고 보니 모든 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뒤집어야 했단다. 


    또 톰 웨이트라는 가수는 한참 운전을 하다가 기가 막힌 멜로디가 떠올랐는데, 펜도 없고 녹음기도 없어서 안타까워하다가 갑자기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봐요, 영감님! 지금 나 운전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내가 그걸 지금 받아 적을 수 있다고 생각하쇼?  … 아니면 그냥 레너드 코헨한테 가보시던가!’ 






    그러니까 나는 내 할 일을 꾸준히 못하고 종일 게으름을 피우다가 한바탕 달리고 오니 지니어스가 때마침 나를 지나가는 거라, 그래서 얼른 붙잡아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거센 비바람과 함께 나를 찾아온 지니어스를, 하마터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 뻔한 지니어스를 붙잡아 이렇게 글로 쓰고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책상에 앉지는 못하지만,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여차하면 노트북을 켜 한 바닥을 받아쓸 수 있는 민첩성도 재주라면 재주 아니겠는가. 물론 그 도토리만 한 재주만 믿지 말고,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는 끈기도 키워야겠지. (제발!) 그렇게 매일 내 몫을 다해야 나중에 지니어스에게 큰 소리라도 칠 수 있으니까. 내 몫을 성실히 이행하는데도 글이 써지지 않으면 그건 나의 책임이 아니라 지니어스의 책임이니까! 이 얼마나 명쾌하고 후련한 선언인가! 작가로서의 앞길이 한결 밝아진 느낌이다. 아, 그리고 애트우드 할머니 말씀대로 나를 사랑했다가 미워하는 변덕도 너그럽게 받아줘야지. 가끔 '주말에는 놀아도 돼!' 외치면서. 




    자, 여기까지 부지런히 쓰긴 썼는데 … 내가 지금 뭘 쓴 거지? 아니, 지니어스 영감님, 도대체 뭘 주고 가신 거유?     



    흠, 그래도 뭐든 줬다 칩시다. 덕분에 이렇게 또 한 편의 글을 썼으니. 이왕 썼으니 정리해 보자면, 자신을 더 골고루 사랑하고 또 미워할 것. 그리고 끈기와 민첩성을 키울 것. 그러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나부터 믿을 것! 



    아, 그런데 영감님! 다음에는 조금만 더 영양가 있는 글 좀 안 되겠습니까?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테드 강연, 꼭 들어보세요! 

https://youtu.be/86x-u-tz0MA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최신작이 궁금하다면, 제가 번역한 책 <시티 오브 걸스>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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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의 책 <결혼에도 휴가가 필요해서>도 덤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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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etroSuppl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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