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바꾼 일상 중 하나는 줌(Zoom)이다. 이제 줌을 카메라 용어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열 살 짜리도 줌 수업을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이들 때문에 외출하는데 시간 제약이 있던 나는 줌 모임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오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모임 도중에 아이들을 챙길 수 있으니까. 줌 초창기에는 그동안 못 갔던 모임, 수업 등을 한풀이하듯 다 신청했다.
신청할 때는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너무 많이 신청한 건지, 아님 생각만큼 좋지 않았는지 대부분 참석만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사전을 찾아보면 참여나 참석이나 둘 다 출석한다는 뜻이지만 참석은 단순히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뜻만 가진다면 참여는 출석 이상으로 그 일에 관계하고 개입한다는 뜻이 있다. 적극성의 유무라 하겠다.
참여하는 모임을 하고 싶어서 참석만 하게 되는 모임을 점점 줄여갔다. 이제 내 줌 모임은 딱 한 개다.
코로나 전, 결혼식 참석은 거의 의무감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예식장에 누굴 초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반가웠다. 그렇게 1년을 보냈는데 이번 5월에 결혼하는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몇 년 만에 가고 싶은 결혼식이 생겨버렸다. 마흔이 넘었지만 늘 비혼은 아니라고 외쳤던 친구의 곁에 누군가가 나타난 거다! 그 누군가는 늦은 연애에 필수처럼 따라붙는 얼마간의 모호성이 없는사람이었다. 인연은 따로 있다는 낡은 말에 경외심이 생겼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서 지금 5학년인 큰 애 돌잔치 때 입었던 원피스를 찾아냈다. 내가 이렇게 기쁘게 결혼식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던가. 갈까 말까의 고민 없는 삶은 일정 부분 슬림해진 삶의 단면 같았다. 슬림하지만 남김없이 꽉 찬 축하가 내 안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결혼식은 당사자의 가족이 아닌 한 '참여'까지 가기 어렵다. 관객은 그저 '참석'해서 손뼉 치고 사진 찍는 게 전부다. 물론 그 박수조차, 사진조차 생략하고 봉투로 출석을 대신한 적도 많다. 그럼 결혼식에서 식을 다 보고 사진까지 찍으면 참석을 넘은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줌 모임을 통해 참석과 참여의 의미가 확실해져 버린 나는 남의 결혼식도 박수와 사진 이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알았다. 보이진 않겠지만 예식을 기다리는 내 마음이 그랬다. 지하철에서 내려 예식장까지 가는 길, 비 오는 대기 중의 향기가 꼭 자작나무 숲 같았다. 참여함으로 들뜬 마음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시내 한복판에서도 자작나무 향을 불러온다.
예식이 끝나고 나오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얼굴을 쑥 내밀고 천연덕스레 나를 반겼다. 아직 남아있는 물기 있는 바람만 아침의 소란스러운 비바람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지하철 서대전 사거리역 잔디광장의 빗방울이 제가 가진 이상으로 반짝이는 건 햇빛 때문이었다. 햇빛의 참여를 받은 물방울들이 사방에서 반짝이느라 대낮에 별빛이 내려앉은 듯했다.
참석도, 참여도 어딘가에 출석하는 건 같지만 출석한 자리를 빛내는 건 분명 참여이다. 만남 자체가 소중해진 이때, 기왕이면 빛날 수 있는 출석을 해보려 한다.
내일, 아코더 작가님은 ‘지우개’ 와 ‘수정테이프’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