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코더 May 06. 2021

사랑은 연필로 쓰지 마세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그녀와 사귀기로 한 1일부터 그림일기를 어요. 프로포즈 하는 날, 양장본으로 만들어 선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죠.


크림색 벙어리장갑을 끼고 온 작은 손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녀의 손을 제 코트에 넣고 걸었던 첫 데이트를 잊지 못합니다. 붕세권인 그녀 집 근처 붕어빵집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슈크림 붕어빵을 사 먹었습니다.  날, 그림일기에는 붕어빵과 벙어리장갑을 그려 넣었죠.


그녀가 삶에 들어온 후로부터 마법처럼 세상이 온통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요. 가로수가 끝없이 펼쳐진 평소 걷던 거리도 처음 여행 온 낯선 도시처럼 새롭게 보였습니다.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 속 주인공은 모두 저와 그녀를 향했습니다.


햇살 아래 웃고 있는 오 그대는
가볍게 팔짱 끼며 폴짝대는 오 그대는 나의 여신
어딜 갈까 물어보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대뜸 아무거나 함께라면 좋다는 오 나의 여신님
격하게 아껴요


그녀만 생각하면 귓속에 맴도는 그 가사를 자주 끄적이고는 웃음 짓곤 했어요.






그녀와 의 초침이 움직이는 속도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틈은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책 <인생의 계절>중에서
당신 시간 속에는 내가 없잖아.
당신이 바쁜 만큼 나도 더 바빠져야만 했어.



처음 그 날로 돌아갈 심산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날들을 지우개로 박박 지워봅니다만, 꾹꾹 눌러 남긴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나는 손을 잡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쁜 나만큼 그녀와 나 사이 보폭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자 종종 "내가 먼저 가서 주문할게."라고 말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써 패여들어간 종이에는 흑연가루만 사라졌을 뿐, 내용은 선명히 남았습니다.


내 앞에 선 그녀는 점점 얼굴이 시뻘게 지면서 이내 왈칵 울음을 터뜨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좀처럼 행복한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듯한 느낌,


흑연가루를 머금어 까매진 지우개 가루를 털어 내며 한동안 지워진 글자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리 선명하게 사랑의 날들을 적어갔을까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가사를 애꿎게 탓하며 눈물로 번진 일기장을 수정테이프로 메꿉니다.


선명한 날들을 깨끗이 지우고 첫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화이트로 이 일기장을 다, 덮어버리고만 싶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일기장 속 장면들을 자욱조차 남지 않게, 그녀도 나도 모두 잊고 살아가기를 바라봅니다.




내일, 위즈덤 작가님은 '독립'과 '자립'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넘어 결혼하면 재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