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다’와 ‘무엇이 되다’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한 사람 안에서 이 두 문장이 부딪힐 때 많은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사진 찍기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얼마 안 지나 다른 누군가가 묻는다. “그거 해서 뭐 하려고?” 이 질문은 곧 ‘무엇이 될 것인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누군가 “그거 해서 무엇이 될 것인가.”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그러니까 “사진을 잘 찍으면 제품 리뷰 협업으로 원고료를 받아!” 식의 수량 환산이 되지 않으면 그 무엇을 좋아해서 시작한 나는 실속 못 차리는 미련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렇다고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리뷰 제안이 들어오기는 로또보다 더 낮은 확률이기에 할 말이 없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저 쓰는 게 좋아서 한참을 쓰다가도 누군가가 “그렇게 열심히 써서 뭐할 건데?”라고 물으면 막상 할 말이 없다. 내가 시간을 들이는 이 일을 정당화시키려면 목표점을 찍어놓고 달려야 할 것 같다. 쓰기의 목표점? 작가가 되어야 하나? 그럼 무슨 작가? 시인은 남이 쓴 시도 이해 못하는데 내가 시를 쓴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고, 소설가는 그 광대한 상상력에 시작도 전에 기가 죽고 지금처럼 일상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 에세이스트?
‘무엇을 할 것인가(글쓰기)’에서 ‘무엇이 될것인가(에세이스트)’로 넘어가 버리면 좋아서 하는 일에 자기 검열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이런 걸 글이라고 내보이면 일기는 일기장에 소리만 들을 거야. 이 표현은 신선하지 않아. 이 문장은 세련미가 없어.’ 등등.
검열에 납작해지면 좋아서 하던 일이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린다. 좋아서 하는 무엇에 '무엇이 될것인가'를 들이밀며 수치환산을 시작하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힘들어진다.
'무엇이 될 것인가'에 집중해서 좋아하는 일을 외면하고 공인중개사처럼 남들이 실용적 자격증이라고 하는 일에 매달린다고 치자. 그러면 고민이 끝날까.
좋아하지 않는 일인데 ‘되다’의 명제에 잡혀 우격다짐으로 끌고 가다 보면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를 고민하게 된다. 메멘토 모리라는데, 지금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중도 행복하지 않다는데, 언제까지 하기 싫은 일을 붙잡고 있어야 할까. 식의 현실 자각.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든 ‘무엇이 될 것인가’든 그 둘이 정확하게 겹쳐져서 다른 사람들이 묻는 가치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내적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하며 수량적 환산을 고민할 것인가. 아니면남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무엇이 될 것인가’를 하며 지금의 행복을 담보 잡힐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내일, 아코더 작가님은 '서점'과 '헌책방'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