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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n 03. 2021

찌질함을 넘어 영원함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지금까지도 교회에서는 기도의 시작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자주 말한다. 어릴 때부터 듣던 말이라 그러려니 했다. 어느 때는 그 말만 들어도 감동스럽기도 했고. 그런데 창세기에서 이들 부자가(네, 아브라함이 아빠고 이삭이 아들입니다) 아주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부분을 읽었다.


아브람은 남쪽 땅으로 내려가기 전, 아내 사래에게 말한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당신을 탐내서
나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있을 거요.
지금부터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당신은 내 누이가 됩시다.
그게 당신이
날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20:11-13)

아니.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을까. 지가 살자고 마누라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도 된다고?



사라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이제부터는
당신을 지아비로 믿었던
내 과거를 돌려놓는 게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다.
이 넘편느므스키야!”


라고 하지 않았을까.


흉년을 피해 이삭이 아내와 함께 그랄로 이주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해 물으면 이삭은 리브가를 누이라고 말했다. 리브가가 아름다워서 그곳 사람들이 그녀를 탐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날 당시를 기억하는지. 마실 물을 청했더니 사람들의 물은 물론 동물들의 물까지 챙겨주는 따스한 지혜로움에 반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리브가에게 “나보다 센 놈을 만나면 당신은 아름다우니까 그놈과 몸을 섞어서 그가 나를 해치지 않게 좀 해 봐.”라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아내를 이용한 내 신상 지키기’ 특강이라도 한 것 같다.


이들 부자에게 이승기의 특강이 필요합;;;


자식이 없던 아브람은 신에게 자식을 약속받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도 바꾼다.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사래 역시 사라로 이름을 바꾸라고 하면서 열국의 어머니가 된다. 그들 사이에 약속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이삭이다.


창세기의 부자 찌질 스토리를 보면 그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도 어쩌면 사라와 리브가의 공이 크다. 그런데 왜 사라와 리브가의 하나님은 없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만 남은 것인가. 성경을 다시 뒤져도 기도의 시작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설정한 부분이 없다.(만일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그렇다면 이런 시작 역시 그 시대의 가부장 문화를 대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잇는 찌질함은 짜증 나고 어처구니없긴 하나 이것까지도 기록했던 자체는 높이 사고 싶다. 적으면서도 찌질하다고 느꼈을 텐데 삭제하지 않았으니까(행여 당시는 당연하다고 적었을지 몰라도 후대로 내려오면서 누군가는 찌질함을 알았겠지. 제발 알았기를) 


아주 오래된 고전이 보여주는 아주 현대적인 감각은 이 두꺼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을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찌질함을 삭제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서 삶은 찌질할수도 있지만 그조차 인정하고 나은 방향으로 가는거라고 말한다.


어느 목표점 하나로 고정된 깨달음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아가는 진행형의 깨달음이라고, 이 찌질함이 내게 말한다. 그러니 영원함이 된 찌질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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