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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31. 2021

그 무지개가 그 무지개가 아닐 때

노아의 방주(3)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신은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무지개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약속, 증표, 나아가 인간이 감사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바라본 무지개는 ‘화난다고 너무 극단으로 가지 말자, 그럼 후회한다’로 읽힌다. 세상이 물에 잠겨 있는 그 시간동안 신이 후회했던 게 아닐까. 내 창조물들을 내가 쓸어버리는 참담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묻지도 않았는데 막 무지개를 보여준 게 아닐까.      


   아니, 신의 참담함이 아니고 나의 참담함을 기대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도 몰랐던 극단의 헐크력을 확인하니까. 뭐든 극단으로 치달으면 득보다 실이 많다.      


“숙제 다 했어?”

“아니, 좀 쉬었다가 하려고”     


“두 시간이 지났는데 쉬었다가 한다고?”

“오자마자 시작하면 힘들잖아”     


“두 시간은 오자마자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인데.”

“해주지도 않으면서 왜 시간까지 뭐라고 해!”      


“그게 내 숙제냐? 내가 학교 다녀??? 너 정말 그딴 식으로 할 거면 @#$%”     

  망치로 두드린 고기는 넓고 연해지지만 말로 두드린 아이는 아이 생기 없는 종이인형이 된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오은영 박사는 만12세까지 아이를 화로 가르칠 수 없다고. 화로 가르치면 가르치는 내용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어른의 화만 기억한다고 했다.      


   오은영 박사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아이 숙제는 엄마 숙제가 아니라고. 아이가 숙제를 못해서 혼난다면 그것도 배움이니 기다리라고. 노아의 방주에서 기다림을 배운다고 좀 전까지 아는 채 했으면서 왜 또 헐크력을 발사하냐고.      


“화내면서 말해서 엄마가 미안해. 그냥 말할 수도 있는 건데.”     


   아이는 아무 말 안했는데 내가 먼저 가서 무지개처럼 예쁘게 말을 건다.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준다. 다시는 네게 헐크력을 발사하지 않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다른 무지개를 총동원해본다. 신이 노아에게 보여준 무지개가 언약의 증표였다면 나의 무지개는 반성문이고 제동장치다. 후회할 짓 말고 한 걸음만 참으라고, 행여 못 참았더라도 빨리 수습하라고. 성경 속 무지개를 그렇게 읽는다.       


  방주가 방주이기를 그치고 다른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내게 남아 관성대로 살 뻔한 하루를 새로운 중력으로 길들인다. 이 중력이 무겁고 불편하지만 여기에 길들여지는 게 조금 더 나은 방향이겠다. 나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 성경읽기가 주는 가장 큰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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