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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n 10. 2021

애가 보는 어른이 나 하나라고?

노아의 방주(4)

 홍수가 끝나고 노아는 세 아들과 함께 배에서 나왔다. 셈과 함과 야벳, 이 세 아들을 통해 온 세상에 사람들이 퍼졌다고 한다. 노아는 다시 농사를 시작했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단다. 함이 자기 아버지의 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일렀다. 아비를 조롱한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나체를 덮어주고 계속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나체를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깬 후에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자기 형제들에게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이 야벳을 번창하게 하셔서
셈의 축복을 함께 누리게 하시고
가나안은 야벳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열 받은 노아



 이 구절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분분하다고 한다. 신학을 배울 마음 없는 나는 그저 보이는 대로 읽는다.     


   애초에 노아가 인사불성으로 술 마신 게 잘못 아닌가. 마셔도 곱게 마셔야지 아무리 자기의 천막이라지만 벌거벗고 잘 거는 또 뭔가. 보아하니 문도 안 잠기는 거 같다. 적당히 마시든, 옷이라도 입고 자든.   

  

   함은 가나안을 비롯한 몇몇 자식이 있다. 그중에서 가나안이 가장 방탕한 자식이랬다. 이걸로 노아에게 진즉에 찍혔는지 함을 저주하는 게 아니고 가나안을 저주한다.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로 언급되는 소돔과 고모라도 가나안 지역이다. 그러니 가나안은 타락의 대명사로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지명 이름이기도 하다.   

   

   성경엔 나와 있지 않지만 함의 아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나안이 몇 살인지 모르겠으나 함의 행동을 봐서는 함도 그리 나이 많을 거 같진 않고, 그럼 가나안도 다 큰 자식은 아니었을지도. 그럼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인데...      


   지금 말로 하면 남편이 시아버지 앞에서 실수를 했더니 시아버지가 열 받아서 손주를 저주했다는 뜻이다. 당신의 손주이기도 하지만 내 아들을!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함의 아내가 받을 충격을 상상했다. 이 사건에서 본인 다음으로 충격이 가장 큰 사람은 함의 아내일 거 같은데 어떻게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문자 그대로 날벼락일 텐데 말이다.     



 

  학교와 학원을 갈 때는 내 반 담임, 옆 반 담임, 강사 선생님 등등 이런저런 어른을 만나면서 ‘어른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구나’를 알게 모르게 배울 텐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삼시 세끼와 온라인 숙제 검사가 부담스러웠는데 노아의 흐트러진 모습으로 파탄에 이르는 삼 형제의 모습에 내가 괜히 정신이 번쩍 든다. 애가 보는 어른이 나 하나라고?     


   내 나이는 분명 어른의 나이가 맞긴 하지만 성숙의 척도로 나를 봤을 때 과연 내게 ‘어른’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지. 무기력하고 모자란 스스로를 마주하느라 밤마다 이불킥 루틴이 될 지경인데 그게 또 아이들 눈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 하아, 더 이상 말을 말지.      


  코로나 시국에 학력격차 어쩌고 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뉴스가 나오면 뒹굴 거리는 아이들을 일으켜 뭐라도 억지로 시키고 싶어 진다. 방주 이후의 사건들을 읽다 보면 평소에 아이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내 불안감으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강요하면 ‘힘 있는 사람은 억지로 시키는구나’를 은연중에 가르치는 게 아닐까. 식의 생각.  


   노아와 함의 평소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소에 반감이 쌓이면 아이의 이해심도 바닥날 거란 건 자명한 일. 그래서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학교를 안 가니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냐고. 네가 생각하기에 저런 걸 배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엄마가 살아보니 배울 땐 귀찮아도 해두면 나중에 분명 쓸모가 있노라고. 반도 설득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이 시간이 귀하다(라고 쓰고 피곤하다고 읽는다. 그냥 해! 이게 제일 쉽다)      




  노아의 방주는 좀 더 나은 어른이 되는 일을 보여줬다면 방주 이후의 삶은 나를 기르고 아이를 기르는 이 동시다발적 상황을 또 보여준다.


 뛰어넘어야 할 인생의 어떤 순간들이 있다면 내게는 지금이지 않을까 싶은, 내 마음과 아이들 둘 다 다스려야 하는 화창한 초여름이 지나고 있다. 이 여름의 화창함만큼 나의 육아도 그런 날이 한번씩은 오기를. 매일이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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