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Jun 16. 2021

선배, 제가 싫으신 거죠?

장황함 vs 디테일

선배가 내 글을 읽더니 '친절하게 쓰라'라고 했다. 불친절하면 읽기 어렵다고. 그래서 다시 썼더니 선배 왈.


"친절하라고 해서 장황해지면 더 안 읽지. 디테일은 좋지만 장황은 지겨워."


하란대로 했는데 지적이 업그레이드 됐다. "선배, 제가 싫으신 거죠?"라고 받아치려다가 일단 입을 닫고 글을 들여다봤다. 본다한들 답이 생기진 않지. 글은 덮고 읽던 토지를 열었다. 상현이 익준을 만나는 장면이다.


 '상현은 아무런 열의도 없이 내뱉듯 말했다. 안익준은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누르며 생각을 한다.'


상현은 앞에서 계속 나오던 사람이라 그가 열의 없이 내뱉는 건 충분히 짐작된다. 10권에서 처음 나온 안익준이 혀로 윗입술을 누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하면서 안익준의 얼굴이 그려져 버렸다. 그다음부터 둘의 대화는 드라마처럼 영상과 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이게 다 '윗입술을 누르며' 생각하는 걸 디테일하게 그린 박경리 작가님의 공이다.


디테일은 글을 이미지로 상상하게 한다. 이미지가 되면 읽기에 더 집중한다. 길게 쓴다고 될 일은 아닌가 보다. 안익준 묘사는 겨우 한 줄이었으니까.


안물 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에서 '안궁'을 쓰면 장황함이 된다. 기획 제안을 받고 쓰는 글 아니고서야 '안물' 모든 글쓰기의 기본 전제 일터,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기술 또한 디테일이다. 그래서 시작을 임팩트 있게 하라고 하지. 때론 어그로까지 끌어가며!


디테일을 살리는 건 궁금함으로 눈길을 잡아채 남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심는 일이다. 그러니 남의 눈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니 역지사지, 읽히는 글을 쓴다는 건 역지사지와 통한다.


내 글을 남이 잘 알아듣는다면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 남의 마음에서도 일어났다는 뜻이다. 한 번에 두 곳에서 살아냈다는 뜻이다. 역지사지인 동시에 두 곳에서 작동할 만큼 나를 더 깊게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장황함과 디테일을 고민하면서 수학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답은 못 찾았다. 대신  나를 더 들여다보라는, 그러면서 남도 헤아리라는 근본적 자세를 고민하게 하는 선배는 천재인가. 제가 싫으신 거죠?라고 도발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겐 디테일이고 선배에겐 장황의 문단들이 또 생길 거다. 쓸 때마다 확인받을 순 없으니 내가 써도 선배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하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가 이리도 절실히 필요하다니. 선배의 빨간펜을 디테일하게 상상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




내일, 아코더 작가님은 ‘일몰’ 과 ‘일출’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에게 '스승'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