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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n 29. 2021

유월절은 천재적이다

명절음식

‘이 집은 굶고 사나’ 소리가 나올 만큼 냉장고 음식을 탈탈 털어먹고 나서야 장을 본다. 이 루틴이 깨질 때는 명절이다.


명절이 끝나면 양가에서 싸주신 갖가지 음식 봉지가 냉동실을 점령한다. 되도록 빨리 먹어 치우려고 하지만 나보다 몇 배는 손이 큰 양가 어머니들을 따를 재간이 없다.


냉동고에서 굴러떨어진 떡 봉지에 발등이 찍힌 날, 퍼렇게 물들어가는 발등을 보며 생각했다. ‘유월절은 천재적이야!’



일단 명절이라고 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야 하는데 유월절 음식은 너무 간단하다. 누룩 넣지 않은, 즉 발효되지 않은 빵이 기본이다.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음식이 아니다.

명절의 의미가 우리와 다르긴 하다. 추석은 연중 먹거리가 가장 풍부했고 이날만큼은 잘 먹자는 마음이었기에 다채로운 명절 음식이 생겼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겪은 과거의 고난을 기억하고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자는 마음을 되새긴다. 되새기려고 그 시절처럼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조차도 많이 하지 않는다. 기록을 보면 식구가 적어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을 때는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한다. 잉여 음식이 있을 수 없다.

명절 직후 인기 검색어가 ‘명절음식 재활용’ 으로 뜨는 거 보면 음식 남는 집이 많다는 뜻이겠다. 포털 사이트에는 ‘명절음식을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리는 며느리’ 글이 한동안 자리를 차지했다. 검색어와 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만드느라 고생하고 버리느라 눈치 보는 이 많은 음식은 대체 누구를 위함일까. 

유월절엔 이 모든 과정이 없다. 일단 절대적인 양 자체가 많지 않고 그것도 양을 계산해서 하래고, 그 시간 동안 급히 먹어버리라고 하니까. 종일 전 부치느라 전과 사람이 기름으로 물아일체 되는 시간도 없겠다. 물론 명절음식 재활용 이런거 검색할 일도 없겠고.



유월절이 3천 5백 년이나 지속되는 이유는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일방적인 애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친하지도 않은, 어느 한쪽은 딱히 조심스럽지도 않은 애매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그 많은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게 명절 스트레스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유월절보다 유월절 음식에서 신의 사랑을 본다. 아무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을 본다. 명절 음식이 유월절만큼만 간단해져도 명절에 가족싸움 나는 일이 좀 줄어들지도 모른다. 유월절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읽은 유월절은 가족의 화평을 추구하는 명절이다. 명절 후 이혼 조정신청 증가, 이런 기사를 요구하는 신은 아니니 말이다.

코로나로 잠시 주춤하지만 요 몇 년 사이 명절마다 해외여행 이용객이 급증했다. 누군가는 전통이라고 말하는 명절 행사를 거부하는 신호다. 여행객 숫자는 매년 증가했다. 거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명절에 뭐 먹지?”는 누군가에겐 소소한 기대다. “명절에 뭐 해 먹지?”는 누군가에게 무거운 의무감이다. 명절 음식을 많이 해야 하는 집이라면 그 노동이 특정 누군가의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식 쓰레기가 되는 집이라면 양을 줄여 빨리 끝내고 나머지 시간은 평화로우면 좋겠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면 명절 공항 이용객만 늘어날 거다. 추석도 3천 5백 년 이상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 속 유월절과 추석을 겹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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