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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l 28. 2021

무덤에 스스로 들어가다

52만 5천600분

"five hundred twenty 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52만 5천600분)"


뮤지컬 <렌트>의 주제가 <Seasons of love>의 시작 부분이다. 차가 쩌렁쩌렁하게 볼륨을 올리고 따라 부르는 중이었다. 끼이이익~ 쾅.


2007년 3월 원효대교 북단, 신호대기 중인 내 아반떼를 무쏘가 들이받고, 무쏘에 밀린 나는 내 앞의 NF소나타를 박았다. 무쏘가 속력을 줄이긴 했지만 내차와 소나타의 뒷 범퍼는 찌그러졌다.


사고 소식에 엄마가 부랴부랴 서울에 올라왔고 나는 입원을 했다. 구남친과의 연애가 한 달이 조금 안 됐을 때다.


그가 병원에 온 첫날, 엄마를 위해 갈아입을 티셔츠와 심심할 때 볼 잡지,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왔다. “어머님 취향을 모르겠어서...의 이유를 댄 명백한 과잉 쇼핑이었다. 나를 위해서는 그의 PMP에 프리즌브레이크 시즌1을 다운받아 주고갔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다. 불과 14년 전인데 백악기 시대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그의 과잉쇼핑과 백악기시대 문명은 엄마와 나의 동상이몽을 만들었다.


나 : "감옥 지도를 몸에 새겼어. 짱 멋있지"

엄마 : "젊은 애가 어찌 그리 배려심이 있대냐"

나 : "얘가 주인공이야. 석호필. 눈빛 좀 봐"

엄마 : "정서가 안정된 애 같아"


미드 주인공에게 넋 나간 딸의 정서는 엄마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고 6개월 후, 구남친 부모님과 상견례를 했다. 결혼 소식을 전하러 본가에 내려가 지인들을 만났다. 반응이 비슷했다.


"너랑? 결혼한대? 누가? 특이하네."

"그 남자 취향이 남자야? 왜 남자랑..."

"... 고마운 분이네"




연애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결혼은 멀었던 시력을 되찾게 만든다. 시력을 찾고 보니 무덤이라 놀라는게 결혼이라나. 그런 무덤에 나 스스로 들어왔다. 내 결혼 소식을 의아하게 여긴 지인들만큼 나도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는데 말이다.


뮤지컬 렌트는 무대변환이 없는 공연이다. 스토리는 복잡한데 세트는 단조롭다. 결혼생활과 비슷하다. 일상에 화려한 세트변화는 없어도 그 속의 스토리는 지진나게 복잡하니까.  렌트의 주제가 Seasons of love는 지루한 세트의 한 가운데 서서 사랑의 1년은 몇 잔의 커피로 가늠되냐 묻는다.


쨍한 시력으로 커피 한 잔을 들고 무덤을 돌아본다. 무덤은 맞는 거 같다. 많은 의무감에 깔려 그대로 즉사할지 모르니까.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고 되묻는다. 52만 5천600분(1년을 분으로 환산) 모두 의무감에 깔리냐고. 그건 또 아니다. 의무감이 준 자유와 안정은 결혼 무덤에만 있으니까.


결혼이 만든 남편이라는 세계에서 52만 5천600분 중 몇 분씩 황홀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결혼이 무덤일지, 사랑의 계절일지는 결혼보다 그 안의 있는 사람들이 만들 일이라는 걸. 그러니 결혼은 무덤! 이렇게 끝나는 완료형이 아니고 방향을 만들어가는 진행형이라는 걸.


https://youtu.be/Zp5Eyt7k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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