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Aug 15. 2021

아이를 끈으로 묶어두는 일이란

그냥 동영상 말고 4D

내가 처음 보행기를 탔을 때 그렇게 좋아했다는데 타자마자 현관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열 평짜리 연립 주택은 온전히 떨어질 만큼의 현관 공간도 안 나와서 문과 턱 사이에 끼었다고.     


할머니는 긴 끈의 양끝을 장농 다리와 보행기 다리에 묶었다. 끈의 길이는 당연히 직선거리 현관까지였겠지. 보행기 방향을 바꿔서 좀 더 멀리 가려해도 끈에 걸렸단다. 그럴 때마다 10개월 아가는 옹아리로 가능한 최대치의 화를 부렸다나.    

  

출근하는 엄마가 흔치 않던 시절이다. 사표를 내려던 길석님은 ‘보행기를 묶지 않는 집으로 이사 갈 때까지만 돈을 벌겠어!’의 마음으로 출근 아침을 깨웠다. 얼마 후 15평으로 이사 갔지만 생각보다 보행기의 반경은 넓었고 내 동생도 태어나면서 퇴사의 꿈은 20년 후로 미뤄졌다.      


나중에 길석님이 말했다. 니들 크는 게 스냅사진으로는 있는데 동영상 재생이 안 된다고. 손주들을 보니 스냅사진과 동영상의 차이가 크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 너는 니 애들의 모든 순간을 동영상으로 잘 기억하라고.      


알았다고는 했지만 내 애들이 너무 삐약이 시절이었다. 둘째 아기띠를 하고 첫째 놀이터를 쫓아다니다 보면 순간의 기억따윈 사치 같았다. 통잠을 못 자는 하루는 너무 긴데 일주일은 너무 빠른 느낌, 사기 치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사기당하는 느낌. 지루한 표정과 피곤한 말들도 하루를 채우면서 어느샌가 염불처럼 욕을 한 적도 있다.

 

어떤 일은 겪고서 한참을 지난 후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 만일 실시간으로 의미를 알아챈다면 그 순간은 선물이 될거다. 삐약이 시절의 선물은 다 놓치고 이제서야 허겁지겁 내몫을 챙기는 중이다.


둘째는 태권도장 여름용 도복을 입지 않는다. 존경하는 사범님들이 여름 도복을 입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다. 이 폭염에 그 긴 도복을 입고 놀이터에서 놀면 애는 땀으로 염장된다.      


60프로의 땀 냄새와 35프로의 쇠 냄새와 5프로의 아이 냄새가 난다. 5프로는 축축한 아이 정수리에 내 코를 박아야 희미하게 난다. 아니 어쩌면 내 상상 속 냄새일지도. 아이 앞머리는 땀에 푹 적셔 덩어리로 갈라졌고 뾰족해진 뒷머리 제비추리에 이슬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열기가 가시지 않아 발갛게 달궈진 탱탱한 볼에 내 볼을 비비면서 말로는 얼른 씻으라고 한다.


애는 깔깔거리며 이러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얼른 씻느냐고 되묻는다. 그러게. 얼른 씻으면 이 땀, 쇠 냄새가 없어질 텐데 왜 그게 아쉬운지 모르겠구나.      


길석님의 동영상은 틀렸다. 그냥 동영상이 아니라 4D이다. 냄새와 촉감까지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내가 출근하지 않기에 자주 볼 수 있는 4D이다.


보행기 시절은 간직하진 못했지만(벌써 기억이 안 난다) 본격적인 사춘기가 오지 않은 이 시기는 꼭 4D로 챙긴다. 사춘기가 와서 “이 아이는 누구신지?”  때 이 4D를 꺼내보며 입을 닫아야지 다짐한다. 어떤 행복은 땀냄새로 다가와 세포 하나하나를 귀여움으로 채운다는 것을 배운다.     


오늘도 여전히 폭염주의보가 내렸고 긴팔 도복을 입은 아이의 킥보드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딱 입추만큼의 소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