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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Nov 22. 2021

0.5배속의 아름다움

아산병원 외래진료실에서

"여긴 서관 1층, 서. 관. 1. 층.이고요. 동관 가셔야 해요. 오른쪽으로 쭉 나가셔서..."

아산병원 외래 진료실 앞. 어느 간호사가 70대 노부부에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높은톤과 상대적으로 느린 말투는 북적이는 대기실에서도 선명한 질감으로 떠올랐다. 저절로 나는 그 간호사에게 집중했다.  노부부가 끄덕이지 않으면 처음으로 돌아가 더 상냥하게 설명했다.

간호사는 중요 단어를 볼펜으로 쓰려다 재빨리 네임펜으로 바꿔 썼다.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그 글자에 온기도 스몄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내 차례가 됐다. 아깐 0.5배속이었나 보다. 말이 진짜 빠르다. 네임펜 대신 볼펜으로 휘릭 쓰고 눈 맞춤도 없다. 그의 신속 정확, 사무적 태도는 뚜렷하게 경로효친적이었다.

내겐 0.5배속과 네임펜이 필요 없다는 그의 태도는 상냥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당신은 알아들을 테니 내 속도로 하겠다고, 당신에게 아낀 시간은 다른 노인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이해 가능한 차별이었다.

그의 차별은 '답답한 노인들'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난 여정이었다. 공감력은 말을 천천히 하는 걸로도 충분히 키워진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서비스업이니 당연하지 않냐고? 그곳은 1.5미터 간격으로 한눈에 네댓 명의 간호사가 보인다. 노인 환자가 그 간호사 담당 진료실에만 있진 않을 텐데 0.5배속은 거기서만 들렸다.

끝내주는 구호 없이도, 심금을 울리는 희생 없이도 누구도 반박 못할 배려가 거기 있었다. 배려보다 혐오가 넘치는 세상에서 그의 0.5배속은 작은 답을 준다.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가장 배려 넘치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장한 각오로 하는 배려 대신 0.5배속 같은 가벼운 배려를 쌓아보려 한다. 가벼운 배려가 쌓이면 비장한 배려도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가벼운 배려가 널리 퍼지면 지금 만연한 혐오의 농도가 좀 옅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세상을 치료하는 작은 배려가 아산병원 외래 진료실 앞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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