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좋아한다. 와인에 대한 조예는 없다. 그 알싸한 떪음이 혀를 돌아 넘어가는 게 그저 좋았다. 취향이라고 믿었다.
통장이 텅장이 됐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와인을 사지 말까?'였다. 맥주보다 비싸니까.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가 취향이다. 월세 5만 원 인상 소식에 그는 미련 없이 방을 뺀다. 가사도우미의 일당으로 사는 미소가 월세를 더 내려면 취향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읽은 세계명작 '소공녀'가 떠올랐다. 부잣집 소녀로 기숙학교에 입학했지만 갑자기 고아가 되면서 다락방 하녀로 전락한 세라 이야기다. 세라는 늘 '공주가 되는 상상'을 하며 고난을 이겨낸다. 물론 현실에서도 공주처럼 품격과 정의를 지킨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은 세라처럼 부자인 적이 아예 없는 거 같은데 왜? 하는 물음표가 생길 때 제목 밑에 나왔던 Micro Habitat가 생각났다. 그 소공녀가 아니고 초소형 주거지를 말하는 소공녀였다.
집을 뺀 미소는 슈트케이스와 배낭 하나가 가진 짐의 전부다. 미소는 그 짐을 이고 지고 대학 중퇴 전 그가 활동했던 밴드 멤버들을 찾아간다. 그 집에서 하룻밤 혹은 며칠 밤 지내면서 이야기가 흐른다.
밴드 멤버들은 가족이 있지만 가족에게 치여 상처를 쌓고 있었다. 혹은 가족이 없어서 상처를 쌓기도 했다. 그랬어도 겉으로 보기에 가장 불안정한 사람은 미소다. 정작 미소는 오르는 물가에 한숨 쉴지언정 흔들리진 않는데 말이다.
밴드 멤버들은 그들의 섣부름으로 미소를 보지만 들여다보면 미소만큼 또 단단한 사람이 없다. 영화 소공녀가 Micro habitat를 넘어 진짜 세라 이야기의 그 소공녀다. 하녀 방에서의 세라가 우아하듯 허름한 날들이 쌓이는 미소 역시 우아해서다. 미소는 세라처럼 상상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데도 그러는 거 보면 세라보다 한 수 위다.
누가 어떤 것을 갖고 있느냐를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는 시대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미소가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저렇게까지 취향을 지켜야 할까 싶은 지점이 여러 번 나오긴 하지만 미소의 담담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것도 생의 한 방식이지 싶다. 확고한 취향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도전 못하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미소의 행보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울 시내 풍경 위로 밴드 멤버들이 나누는 미소 이야기가 겹치면서 미소의 잔상이 계속 웃자란다. 미소의 현실은 초소형 주거지에 있지만 그의 잔상은 그 누구보다 넓게 퍼진다.
영화는 내게 말했다. 와인은 당신의 취약한 취향이라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식주보다 취향이 먼저인 자의 말이니 반박의 여지가 없다.
새해엔 취향이라고 이름 붙일 뭔가가 갖고 싶어졌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니어도 내게는 중요한 '별 거'가 되는 그 취향 말이다. 있지도 않은 그 '별 거'가 아쉬워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