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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0. 2022

빌립보서는 비논리적이다

4장 13절

빌립보서 4장 13절은 유명한 구절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교회 시절이 조금이라도 있던 사람이라면 시험, 자격증, 오디션 등 뭔가 통과해서 올라가야 할 일이 있을 때 이 구절이 주문처럼 튀어나온다. 성스럽고 고결하며 은혜되는 파이팅이다. 그런데 12절부터 이어서 읽다 보면 완벽하게 비논리적이다.


12절 : 나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알고 부유하게 사는 법도 압니다. 배가 부르건 고프건 부유하게 살건 그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래 놓고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면 질문이 나온다.


“저기요? ‘모든 것을 하는 능력’이라면서요. 그럼 가난하고 배고프고 그건 빼야죠. 어떤 형편 말고 ‘누가 봐도 괜찮은 형편’이어야 앞뒤가 맞지 않나요?라고 묻고 싶다.




힘든 형편을 딛고 일어서서 성공했을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죠’라고 연한 미소 지으며 간증하는 것(자매품 모든 성도의 아멘), 그게 표준이었다. 아직 ‘힘든 형편’에 있다면 더 굳세게 ‘능력 주시는 자’를 믿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다. 힘든 형편은 완성형이 될 수 없었다.


앞뒤 맥락이 확실하게 굳어진 빌립보서 4장 13절은 바로 앞 구절로 어이없게 깨진다. 13절만 주야장천 외울게 아니라 12절이랑 묶어서 암송했어야 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의 능력’과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의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고. 그걸 먼저 알았어야 했다.




12월에 작은 일을 벌여놓고 나는 겁이 났다. 우연히 읽은 12절이 그 마음을 다독였다. 시도한 것으로, 쌓이는 경험치로 만족할 수 있어서 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겁이 나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는’ 능력으로 겁이 나지 않았다.


상황에 상관없이 만족하는 능력은 정신승리 이상이다. 정신승리는 안주하는 만족이지만 빌립보서의 만족은 동력이 꺼지지 않는 만족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를 쓴 바울의 동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빌립보서는 본질로 접근할 때만 논리적이다. 4장 13절 하나만 톡 떼다가 주문처럼 받든다면 영영 비논리적인 빌립보서로 남을 것이다. 본질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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