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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r 08. 2022

오은영이 된 최은영

피아노와 수학

지난주, 아이는 내게 연거푸 미안하다면서 피아노를 그만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니 말대로 엄마는 서운하긴 해. 근데 이건 엄마가 감당할 감정이지 니 책임이 아냐. 그러니 안 미안해도 돼. 엄마가 악기를 권하는 이유를 충분히 말했잖아. 여기서 더 말하면 잔소리지. 엄만 악기 하나가 자유로운 게 좋았거든. 넌 내가 아니니 안 좋을 수도 있지”

오은영(소아정신과 전문의)에게 빙의한 최은영의 워딩이었으나 개운하진 않았다.
 
나도 5학년 때 피아노를 끊은 적이 있다. 끊은 지 두 달 만에 벼락같은 피아노 허기가 찾아와 제 발로 학원에 다시 갔다. 당시 나는 소나타를 치다가 관뒀으니 피아노 허기가 올 수 있었으나 바이엘을 치다가 끊는 아이는 허기가 올 거 같지 않았다. 아마 이제 아이의 인생에 피아노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분명 서운했다.

아이는 대신 수학학원을 가겠다고 했다. 자긴 선행이 안되어 있으니 현행 학원을 우선 알아봐 달란다. 친구들은 공부방이나 대형학원을 다니는데 둘 다 싫으니 엄마가 알아봐 줘야 한단다.

빙의된 오은영은 어디 가고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 수학학원을 간다는 말이, 본인 진도와 학원 종류를 파악하고 내게 대안을 제시하는 아이가 낯설었다.

"내가 수학 가면 엄마가 좋잖아?"

정신을 차렸다.

"니가 좋아서 가면 엄마도 좋아. 엄마 좋으라고 가진 않아도 돼. 수학도 마찬가지야"

다시 오은영 빙의 중.

집근처 수학학원을 찾았다. 첫 수업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 지금이라도 빼와서 피아노가 낫다고 설득하고 싶었다. 수학 학원에 가길 나부터도 그렇게 바래 놓고 이 구체적 삽질은 무엇인가.

내가 수학을 싫어하고 피아노를 좋아했으니 아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었다. 기왕이면 수학도 피아노도 둘 다 '잘' 하기를 은근히 바랬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오은영 빙의 워딩을 쏟아놓고 다시 피아노에 집어넣을 궁리를 하진 않겠지.

내 서운함은 내 감정, 피아노보다 수학이 급하다고 느낀 건 아이의 감정이다. 각자의 감정은 각자의 방식대로 스스로 처리하는 걸로. 어머, 오은영 쌤이 또 오셨다.

그제야 수학학원 주변을 벗어났다. 맛은 안 나지만 맛있을 거라 믿는 커피 한잔을 사들고 천천히 걸었다. 길게 늘어진 초봄의 오후 햇살이 내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뒤돌아 보지 말고 얼른 집에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오래, 오은영이 된 최은영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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