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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pr 28. 2022

팀파니에 이것이 있는 걸 모른다고?

예술의 전당

아침 일곱 시 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잠에 발목 잡힌 채 대답했다. 여..보세요?

"언니, 잤어? 오늘 약속 알고 있어?"

L1이었다. 우린 잠도 같이 자고 톡은 하루 100개씩 쓰고 은밀한 이야기도 아는데 나는 얘 번호를 몰랐다. 잡힌 발목을 좀 털어내고 대답했다.

"십 분 이따 일어날 거야. 약속도 알지"

예술의 전당에서 두 명의 L을 만나는 날이다. 애 없이 예당에 가는 건 십오 년 만이다. 모를 수가 없는 약속이다.

풍선 같은 마음이 나를 둥실 들어 올려 한 시간이나 일찍 콘서트홀 로비에 도착했다. 1등은 아니었다. 15분 전에 보낸 L1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테라로사로 내려갔다. L1은 아이보리 반팔 니트에 풍성한 다홍색 롱치마를 입고 있었다. 단아한 진주 목걸이와 단발머리만 손보면 당장 플라멩코를 출 수 있을 듯한 치마였다.

콘서트 시작 3분 전에 L2가 로비에 착륙했다. 도착이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 날아왔다. 검은 롱 원피스에 검은 가방에 검은 구두지만 구두의 보석이 주변 모든 빛을 반사해서 L2도 같이 반짝거렸다.

해설이 있는 클래식 음악회에서 해설이 제일 도움 안 되는 음악회였지만 코로나 이후 첫 오케스트라 라이브 무대다. 그마저도 알뜰하게 챙겨 감사하고 싶었다. 연주가 끝나고 나오니 햇빛은 그의 최대치 적당함으로 남부순환로의 자동차들을 반들반들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나도 반들반들한 얼굴로 "팀파니는 음정이 있으니 한 번에 두 개 쓸 수도 있지." 식의 아는 척을 두 L에게 날렸다. 들은 신기해했고 나는 으쓱했다. 그때뿐이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또 나만 몰라였다.

L들은 모르는 내가 끼어들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나만 몰라서 중간에 끊고 물어봐도 다정하게 대답한다. 이 L들을 보면 내가 인복 받을 만큼 인생 잘 살았나 하고 속으로 으쓱한다.

다음 달은 L들과 미술전시회를 간다. 오케스트라는 들보다 내가 아는 게 간신히 하나 정도는 있었지만 미술 앞의 나는 아마 맑은 백지가 되겠지. 친절한 L2는 큰 눈을 굴리며 설명해줄 거고 L1은 설명 사이의 천재 드립으로 웃음을 흩뿌릴 것이다. 굴러가는 낙엽을 보며 웃는 여고생들처럼 신나게 웃을 우리가 보인다. 몇 년만 일찍 치명적 사랑을 했다면 여고생을 키울 나이의 우리지만 그날만큼은 다 무시하고 여고생 버전에 앉아봐야겠다.

라볶이는 대체 언제 먹을 수 있냐며
둘째에게 전화가 온다. 현실로 돌아가는 시간, 오케스트라 앙코르곡이었던 천둥과 폴카를 흥얼거리며 지하철 출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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