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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pr 20. 2022

계절이 바뀌는데 아직도 이걸 안했어요?

오전의 사부작

경량 패딩에서 반팔로 넘어가는 급한 전개를 보여주던 날씨가 봄비 한 방으로 잠시 주춤해졌다. 반팔에서 트렌치코트로 반가운 후퇴를 한다. 진짜 반갑냐고? 후퇴가 반가운 날은 많지 않다. 그냥 앞으로 가는 게 편하다. 패셔니스타 되는 것보다 내 몸이 편한 게 우선인 나는 후퇴하는 날씨로 일거리가 하나 늘었다.


작년만 해도 더운 날은 40도를 육박했고 추운 날은 영하 15도를 찍었다. 도합 55도의 간극 앞에서 살림 담당자의 옷 정리는 숙명이다. 사계절에 간절기가 더해지면 여덟 계절, 4인 가족이니 32회 차 옷 정리가 필요하다고 쓰려고 보니 문장으로 목 조른다는 게 뭔지 너무 알겠는 거라.


이 방대한 옷 정리를 한 번에 하다 보면 골병 난다. 며칠을 두고 사부작을 시작했다. 사부작의 원동력은 김장비닐, 작아진 옷들을 미련 없이 넣는다. 성장기 아이들이 둘이나 있고 남동생이 누나의 피지컬을 거의 쫓아가다 보니 물려 입을 틈이 없어서다. 한 철 입었는데 소맷단과 바짓단이 훅 올라간 옷들을 보며 열심히 크는 아이의 귀여움과 통장의 텅장을 동시에 그린다.


이 집의 성인 둘 ㅡ 남편과 나 ㅡ 는 옷 정리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더 이상 살이 찌지만 않는다면 올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으니까. 가만, 나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잤는데 방치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옷 정리하다 말고 불꽃 스쾃 300개를 끝낸다. 옷 정리에서 스쾃으로 이어지는 무맥락 살림을 보면 나는 잠재적 ADHD일지도.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붙잡고 애들 옷을 끄집어낸다.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면 만사 오케이인 아들에 비해 옷에 관심이 생긴 딸의 옷장은 그야말로 난공불락. 있는 줄도 몰랐던 옷들이 튀어나온다. 내 맘대로 정리했다가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모르니 일단 한쪽에 몰아놓는다.


아직은 내가 딸보다 조금 크지만 애가 오버핏을 선호하면서 애 옷이 나한테 얼추 맞는다. 느낌 상 애가 더 안 입을 거 같은 옷들을 내가 입어보며 난데없는 피팅쇼가 시작했다. 스쾃부터 피팅쇼까지. 성인 ADHD 검사는 안 해야겠다. 하나마나일 거 같아.   


피팅쇼를 하다 보니 바닥에 먼지가 너무 많다. 옷을 꺼내서 많은 건지, 원래 많은 건지. 이대로 두면 내가 이거 다 마시는 거잖아. 청소기를 돌린다. 성인 ADHD는 이제 그만 말해야지.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시작했는데 벌써 10시가 다 됐다. 위장이 짜증 내는 소리가 들린다. 지극히 탄수화물러스한 한 그릇 식사를 차린다. 혼자 있더라도 나를 위해서 챙겨 먹으라는데, 그 자체가 일거리임을 그들은 정녕 모를까. 그러니 한 그릇 식사야말로 나를 위한 챙김이다. 탄수화물이 몸에 퍼지니 고된 일거리가 별로 일거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마음의 안정은 감정의 일이라기보다 탄수화물의 일이다.


탄수화물이 몸에 쌓이니 쌓인 딸의 옷을 보는 내 시선도 조금은 쿨해진다. 쿨하다는 건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내 억울함 ㅡ 사들이는 건 너고 정리하는 건 왜 나여야 하는데? ㅡ 을 남에게 쏟아내지 않고 툭 털어낸 후 갈 길을 가는 모습이다.


사들이는 사람이 정리하라고 해봤자 아직 아이는 거기까지 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았다. 사들여봤자 부질없다는 건 사들일 만큼 사들인 다음에 깨달아야 태도로 자리 잡는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억압으로 안 사는 흉내만 낸다면 언젠가는 몇 배로 터져서 미친 듯이 사들일 거란 걸 안다.  그래서 나도 억울할 것이 없고 그래서 쿨해질 수 있다. 물론 탄수화물이 충전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긴 하다. 역시, 인격의 완성은 탄수화물이었다.


두 시간이 됐다는 알람이 울린다. 옷 정리에 2시간 이상 몰입하면 다음날 기침 예약이므로 억지로라도 끊는다. 샤워를 하고 아까 골라둔 아이 옷을 입고 주차장으로 간다. 딸아이가 말했던 ‘너무 길지 않고 크롭처럼 짧지도 않고, 약간 톡톡하면서 세련된 무늬가 있는’ 흰 티를 찾아볼 생각이다.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찾는다 해도 그게 아이가 말하는 저 조건에 맞을 지 장담 못한다. 그래도 햇빛 좋은 날이니 일단 나가본다.


살림하는 사람의 어느 오전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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