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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8. 2022

이러면 옷을 안 사도 된다

아이의 옷장

두 번에 걸쳐 신들린 듯 옷을 내다 버린 탓에 빽빽한 행거가 헐렁해졌다. 쌓이는 먼지도 눈에 띄게 줄었다. 공간이 쾌적해지는 일은 별 거 아니었다. 그저 다 갖다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간단해 보이는 일이었으나 간단하지 않았다. 버렸어도 만족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에 비해 집이 헐렁해지긴 했다. 그렇게 헐렁해지면 내가 자유로워질 거 같았는데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버리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나.


다 버려서 비워버리는 게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었기에 해결은 없었다. 모델하우스 같은 단정한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채워진 나는 옷 한 보따리 처분했다고 자유로울 수 없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처럼,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매일 똑같은 옷을 입으면 단순해서 편할 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함보다 지겨움이 먼저 나를 덮쳤다. 내게 남은 건 재미없음이 자가 증식해서 만든 공허함이었다.  


그제야 나의 기준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버렸지 뭘 남겨야 내가 좋아할까를 내게 묻지 않았던 거다. 반면 아이는 본인 옷을 정리하면서 이건 이게 좋아서 남기고 저건 저게 좋아서 남긴다라는 확고한 규칙이 있었다.


그때는 별 기준 같지도 않은 기준으로 못 버리게 하는 것 같아 나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지나고 보니 아이의 기준이 맞는 거였다. 좀 덜 버리더라도 나의 기준에 맞는 것을 남기는 일이 더 중요했다.


확고한 기준이 있던 아이 옷장과 빈 공간을 남기는 것만 기준이었던 나의 옷장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시각적 차이는 없지만 정서적 차이는 확실했다. 내 옷장이 지겨워진 나는 오전 외출 때 아이 옷을 한 번씩 입고 나간다.


못 버린다고 잔소리했던 게 무안해서 아이 없을 때만 잠깐 입는다. 아이가 집에 오기 전에 잘 손질해서 다시 걸어놓는다. 옷으로 숨바꼭질을 하게 될 줄이야.


나만 아는 이 무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쇼핑창을 열었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없음이 느껴졌다. 그저 가격만 확인하고 있었고 이 옷이 내게 어떻게 어울릴지, 있는 옷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가격만 보고 사들였다가 또 버린다면 마음이 툭 꺾일 것 같았다. 이 화창한 날에 가을날 마른 나뭇가지가 될 수는 없었다. 쇼핑 창을 닫았다.

잠깐 아이쇼핑을 했을 뿐인데 눈이 피곤해졌다. 아니, 마음이 피곤해진 걸까. 피곤해진 마음이 무겁게 흔들렸다. 등을 쭉 펴고 귀와 어깨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렸다. 요가 강사들이 말하는 자세다. 요가할 때만 좋은 자세인 줄 알았는데 감정 균형을 잡는데도 좋은 자세였다. 흔들리는 마음이 펴진 등을 따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때로 엄마들은 딸과 자신을 서로 다른 존재로 구분하기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을 때 더 심해진다. 아이의 옷을 입으며 잠깐 나의 취향을 아이에게 기대면서 나를 아이에게 동일시하는 게 아닐까 했다. 만약 나도 모르는 동일시가 있다면 아이가 더 컸을 때 나는 빈 둥지 증후군을 지독하게 겪을 테니 대비책이 필요했다.  


요가 자세로 고요해진 마음이 좋아서 내친김에 요가의 태양 경배 자세를 몇 번 더 했다. 하다 보니 동일시는 너무 나간 마음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아이랑 운동화를 같이 신은지는 이미 오래다. 운동화 하나로 둘이 신으니 이득이라고 좋아했는데 옷이라고 이득이 아닐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아이는 취향이 자주 바뀌는 터라 하나를 오래 입지 못한다. 면 티셔츠가 대부분인 여름옷은 거의 한 철이다. 둘이 입으나 혼자 입으나 한 철 입고 끝날 거면 둘이 입는 게 두 배 이득이다. 빈 둥지 증후군을 고민하기에 나는 나 혼자 놀기를 놀랍게 잘한다.


많지도 않은 옷 정리로 혼자 과한 이야기를 펼친 거 같아서 다시 무안해졌다. 살림이 사람을 살린다는 말은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어서 정신 차리게 한다는 뜻도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에 바람이 쌓여 살살 부딪히는 파동이 기분 좋게 볼을 스쳤다. 헐렁해진 옷장에서 편한 옷을 냉큼 꺼내 입고 골프채를 꺼냈다. 애들 오기 전에 시원하게 공이나 치고 와야겠다.

아이가 그린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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