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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n 02. 2022

연쇄살생의 변(2)

나는 연쇄살생범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 대파 말고 안 죽일 수 있는 식물이 있을지 생각했다. 기르는 축에도 못 낀다는 다육이도 몰살시키는 마당에 안 죽이는 식물을 기대하는 건 과욕 같다가도 하나쯤은 더 있지 않나 하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런 나를 시험하듯 애들 학교에서 봄마다 작은 화분을 보내왔다. 방울토마토는 키만 계속 크다가 새끼손톱만 한 열매 두 개를 남기고 전사했다. 토마토는 웃자라지 않게 가지치기를 해주고 지지대를 세워줬어야 했다. 이름 모를 화분들이 몇 개 왔고 다들 비슷한 운명이 됐다.


아이가 애플민트를 사 왔다. 허브 중에서 생명력이 가장 강하다고 했다. 30년 경력의 화원 사장님이 보증하는 화분도 다 죽이는 마당에 이 작은 허브의 강함은 내게 와닿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애플민트는 쑥 키가 큰 것도, 잎 가장자리가 까맣게 말린 것도 생겼다. 까만 잎을 떼주고 너무 키가 큰 건 토마토가 생각나서 잘라줬다. 자른 가지가 너무 싱싱한데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물컵에 꽂아놓고선 잊었다.


며칠 후, 물컵의 애플민트에 뿌리가 난 걸 알았다. 화단의 애플민트는 따로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작은 싹이 돋아 있었다. 이 집에서 살 수 있는 허브라니, 너는 정말 어디가서든 잘 살겠구나 싶은 마음에 애플민트가 달리 보였다.

애플민트의 난데없는 씩씩함은 내게 그저 ‘좋다’로 끝나지 않았다. 놀람과 대견함, 기특함과 책임감, 귀여움 등으로 이름 붙여지는 많은 감정들이 따라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애플민트를 들여다봤다. 며칠 만에 물컵에서 뿌리를 내린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은 없었지만 그 경이로움 10프로 분량의 작은 행복이 거기에 있었다.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고 감정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고 한다. 애플민트는 행복의 동사와 태도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시작될 때 제일 먼저 베란다의 애플민트를 확인하는 것, 밤새 장식장 위에 올려져 있던 애플민트 물컵을 창가로 옮겨놓는 것 모두 내가 하는 동사다.


애플민트는 새끼손톱보다 작은 잎에서도 특유의 향기가 난다는 걸 알았다. 물컵 속 애플민트를 하나 따서 레몬차에 넣으면 언제 향이 올라올까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작은 잎의 향기를 발견하는 일도, 기다리는 일도 모두 나의 태도다.


동사와 태도가 만드는 행복은 조용했지만 확실했다. 애플민트는 내가 혼자 있는 아침 시간을 몽글몽글하게 채운다. 항상 3배속으로 흘러버려서 아쉬운 혼자만의 시간이 애플민트 행복으로 달콤한 공기가 됐다. 달콤한 공기가 느릿느릿한 시간을 만들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욕심이란 걸 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생긴 것으로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애플민트를 곁에 두면서 연쇄 살생의 변을 한다. 대파도 안 죽였고 애플민트도 안 죽였다고, 나 이 정도면 연쇄 살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겠냐고 아무도 안 듣는 변론을 한다.


어제는 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랐다. 그 기운으로 아카시아 꽃이 더 많이 피었나 보다. 오늘 아침은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이 넘실거린다. 초여름 닮은 바람이 애플민트에 내려앉자 아침이 또 말랑해진다. 죽지 않은 식물이 주는 이 말랑함을 오래 누리고 싶다. 나는 연쇄살생범이 아닐지도 모른다.


관련글 : 연쇄살생의 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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