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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25. 2022

과탄산의 쓸모는 많다. 그러나,

잊고 사는 것에 대하여

과탄산의 쓸모는 많다. 그러나 쓸모가 많다는 걸 너무 아는 나는 문제였다.  


싱크볼 아래 수납장 배수통 사이에 과탄산을 넣어놓고 썼다. 이래저래 쓸 일이 많다 보니 어느샌가 바닥을 보였다.


바닥을 보이는 과탄산 봉지는 '너 과탄산 매일매일 쓰는 사람이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많아야 주 1회 과탄산을 쓰는 사람인데 그날만큼은 과탄산의 주장을 의심 없이 받들었다. 어쩐지 이전 과탄산은 너무 적은 듯하여 쓰던 것보다 2배 큰 용량으로 새벽 배송을 시켰다. 원래 넣어놓던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사이즈라는 걸 포장을 뜯고 알았다.


과탄산의 쓸모는 많다. 그러나 새벽 배송까지 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의 나를 더듬어야 했다.


식기세척기 설치하면서 뺀 싱크대 한 칸을 다용도실에 넣었다. 맞춤처럼 딱 들어갔다.  들여 산 식기세척기 설치하느라 나온 한 칸인데 돈 안들이고 수납장 하나 맞췄다고 좋아했다.


잊고 있었다. 여닫이 수납장은 그 '여닫을' 공간이 있어야 수납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재활용 쓰레기와 빗자루와 키높이 발판과 기타 잡동사니 스물몇 개가 가로막은 맞춤 수납장 싱크대 문을 열 수 없었다. 문 한 번 열으려면 사전작업이 많았다. 문 열기를 포기했다.


뭐를 찾느라 기어이 스물몇 개를 치웠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치우고 열었는데 그 안에 노란 봉지의 과탄산이 다소곳하게 나를 반겼다. 며칠 전 다 쓴 과탄산과 같은 포장지였다. 너무 똑같은 자태에 뭘 찾느라 열었는지 잊어버렸고 아직도 모른다.


과탄산의 쓸모는 많다. 그러나 쓸모가 많다는 걸 너무 아는 나는 문제였다. 쓸모가 많다고 세 개나 사놓고 그걸 잊어서 더 큰 걸로 또 샀으니 말이다.


나도 모르는 새 잊고 있던 이해에 대해 생각했다.  아예 안 쓸 거면 몰라도 언젠간 꼭 필요한 마음이 이해인데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내가 더 이해해야지, 했던 마음이 어느샌가 고갈되어 '맨 정신으로 어떻게 이해하냐고!!'를 외치며 술잔을 들었던 날들이 대체 얼마였던가.


술김에 찾는 마음이 아니라 원래 있다고 믿고 나를 좀 더 들여다봤어야 했다. 분명 쓸모 있는 마음이란 걸 알고 있으니 그전에 잘 쟁여두었을 거라고 나를 믿었어야 했다. 나를 들여다보고 상대방을 들여다보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저 귀찮아서, 수납장 앞의 잡동사니를 치우는 게 귀찮아서 그냥 쉬운 길을 택해버리면 몸에는 술이 쌓이고 주방에는 살림이 쌓였다.


세탁 바구니를 뒤져도 나오지 않던 양말 한 짝이 아이의 침대 밑에서 단체 수학여행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양말을 그때그때 세탁기에 안 갖다 놓으니 결국 침대 밑까지 굴러들어가서 짝이 안 맞잖아! 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별안간 과탄산이 내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양말들을 세탁기에 가져다 놓으라는 말만 했다. 긴장했던 아이는 잠시 멍해있다가 피식 웃으며 팔랑팔랑 나갔다.


저 노란 과탄산 봉지 두 개를 찾지 못했다면 아이가 긴장한 얼굴을 보이는 순간, 그 긴장에 딱 맞는 사자후를 시연했겠지. 아이는 뭐라 뭐라 변명을 했겠고 분에 못 이긴 나는 3단 고음을 내질렀겠지. 5분 후에 바로 후회할 짓거리를 과탄산이 막았다.


과탄산은 쓸모가 많다. 분명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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